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삶과 문화] 그녀의 소리 없는 반란

바람아님 2019. 7. 2. 08:39
한국일보 2019.07.01. 04:42
영화 ‘더 와이프’ 스틸 이미지. 팝엔터테인먼트 제공

사법연수원 재직 중에 서울대 3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을 만나 그 여학생이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을 했다. 만 22살에 첫 아이를 낳은 그녀는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현모양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결혼 후 7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나도 내 인생을 살고 싶어요. 당신과 아이들의 행복과 성공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인생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대학에 다시 들어가 내 직업을 갖고 싶어요.”


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쥐꼬리만한 공무원 봉급을 가져다 주어서인가? 남편과의 미래를 믿지 못해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는 것인가? 아이들은 누가 돌본다는 것인가?’ 그녀가 야속하고 못마땅했지만,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그녀는 수능학원에 등록하여 대학입학시험을 다시 치룬 다음 그 해 약대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약국을 운영했다. 매일 파김치가 되어 밤늦게 들어 왔다.

하루는 내가 물었다. “힘들지 않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텐데. 정말 후회하지 않아?” 그녀는 말한다. “당연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런데 전업주부로 일하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엄청난 노동이고, 과중한 스트레스예요. 그런 우울한 스트레스보다는 내 자신의 일에서 성취감을 얻으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훨씬 견딜 만하고 좋아요.”


난 그녀가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이 바뀌면서 이런 생각을 가진 여성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남편이 성공하고 아이들이 잘 자라면 자신도 덩달아 행복해질 것이라는 착각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거나 스스로 독립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있다.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거듭하는 남편을 보면서 자신의 내조 실력에 행복감을 느낄 것이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인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말썽 없이 자라주는 것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자신의 이런 희생과 정성에 힘입어 안정적이고 행복한 가정이 유지됐다는 결론에 이르면, 급기야는 ‘아, 내 삶의 이유가 바로 이거구나!’라는 심각한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속절 없이 이유도 알 수 없는 허전함과 배신감이 찾아온다. 어제까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던 가족들이 남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반드시 들이 닥친다. 모든 것이 철저히 자신의 희생을 딛고 선 허울뿐인 행복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은 어찌할 것인가?


영화 ‘더 와이프(The Wife, 2017)’는 남편의 성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아내의 숨은 진실을 다룬다. 이 영화로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글렌 클로스의 수상 소감은 매우 인상적이다. “80살을 넘기셨던 그때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난 이 나이가 되도록 아무것도 이뤄놓은 게 없구나.’”

여자로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한번은 이런 근본적인 물음과 맞서게 되어 있다. “아,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전업주부든, 워킹우먼이든 이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자는 없다.


당신 자신의 삶을 살아라. 힘들고 버거워도 이건 당신의 인생이다. 이제부터라도 당신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싶다면, 자기 인생을 귀하게 여기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껴야 할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그들이 당신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잊지 말아라. 당신의 가장 큰 응원군은 바로 당신 자신임을. 그리고 진짜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윤경 더리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