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6.21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7세기 중반 이삼평을 시조로 하는 조선 뿌리의 일본 도자기 유파인 '아리타야키'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다. 중국 경덕진(景德鎭)에서 유행하던 오채(五彩)자기를 모방한 '가키에몬' 양식 등
화려한 채색 자기가 생산되면서 조선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타에서 첨단 채색 자기가 생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제 무역항 나가사키의 존재가 있었다.
나가사키에는 중국의 강남(江南) 상인들이 드나들었고, 이들에 의해 최신 도자기 샘플, 기술, 재료가 일본으로 직통으로
유입되었다. 아리타야키는 조선·중국을 아우르는 국제적 벤치마킹의 산물이다.
때마침 명·청 교체기를 맞아 동중국해 일대에서 복명(復明) 운동을 벌이던 정성공(鄭成功) 일파를 진압하기 위해
청조가 강력한 해금(海禁)령을 발동하자 아리타야키는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는다.
중국과의 교역이 봉쇄된 것은 위기였으나 중국 도자기 입수 길이 막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유럽 수출용 대체품으로
아리타야키를 주목하게 된 것은 기회였다.
유럽 수출을 계기로 아리타야키는 유럽 상류층을 겨냥한 정교하고 화려한 디자인의 서양풍 도자기로 변신을 꾀하였고,
수출항의 이름을 따 '이마리(伊万里)야키'로 알려지며 수십년 동안 유럽 시장을 석권하였다.
이때 축적된 일본의 도자기 역량은 19세기 말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면서 개항 초기 극심한 국제수지 불균형으로부터
일본 경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일본의 도자기 발달을 조선의 인적 자원과 기술을 약탈한 결과로 치부하는 것은 인과관계의 지나친 단순화이다.
원천 기술은 조선에서 왔지만 외부 환경을 선진 기술 도입과 시장 확대에 활용하며 끊임없이 혁신에 매진한 것이
일본 도자기 융성의 원동력이다. 근세 한·일 도자기 역사에는 급변하는 외부 환경 속에서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현대 한국이 귀 기울여야 할 국가 성쇠(盛衰)의 원리에 관한 교훈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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