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5.11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뒤늦게 봤다. 여러 번 울었다.
친구의 엄마는 4년 전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았다. 말 없고 조신하던 엄마가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욕을 하고, 자신의 물건을 자꾸 누군가 훔쳐간다며 악을 쓸 때 딸의 마음은 무너졌다. 이제 엄마에겐
'잃어버렸다'는 동사가 '훔쳐간다'는 말로 영원히 변해버렸다고 말하다 그녀가 또 울었다.
드라마 속에는 사고로 한쪽 다리가 절단된 아들이 나온다.
엄마는 아들의 다리가 장애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운동회' 날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모진 말을 퍼붓는다.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 아프다고 숨고, 창피하다고 피하면 영원히 자립할 수 없을 거란 엄마의 마음은
그러나 어린 아들에게 비수로 꽂힌다. 단 한 번도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준 적 없는 엄마에게 마음을 굳게 닫은 아들이
엄마의 진심을 알게 되는 건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아들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할 때다.
뭐 하시는 거예요?
눈 쓸어요. 눈이 오잖아요. 우리 아들이 다리가 불편해서 학교 가야 하는데, 눈이 오면 미끄러워서.
아들은 몰라요. 그거.
몰라도 돼요. 우리 아들만 안 미끄러지면 돼요.
그 아들이 엄마 덕에 한 번도 눈길에 넘어진 적 없다는 말을 듣고 늙은 엄마가 웃는다.
웃는 엄마 얼굴을 보며 울음을 삼키던 아들이 평생 자신 앞의 눈을 쓸어준 게 엄마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의 얼굴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했던 방식을 뒤 늦게 이해한 사람의 얼굴에 스치는 회한과 다행이 한 얼굴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도감이 이젠 아들의 거친 삶을 조금쯤 순하게 만들 거란 것도 알았다.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지도,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그냥 오늘을 살라는 드라마 속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 꽃 같은 말들이 행복을 다행이라 고쳐 써보았던 어른이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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