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핫 이슈

[윤평중 칼럼] 국가의 근본을 생각한다

바람아님 2019. 8. 3. 09:22

조선일보 2019.08.02. 03:13


'관제 민족주의'로 얻은 정파적 이득, 대한민국의 국가 이익 훼손
국가 생존 가능성과 직결된 동북아 동맹 구조와 세력 균형 해쳐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대한민국이 사면초가(四面楚歌)다. 대일 관계는 최악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 하늘을 휘젓고도 적반하장이다. 북한은 연일 탄도미사일 발사로 우리를 겁박(劫迫)한다. 미국은 남한 전역을 강타할 수 있는 북한의 신형 미사일 도발을 방관하다가 천문학적 청구서를 들이민다.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몇 배로 올릴 낌새에다 무역 문제로 우리를 압박한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자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이 동북아 동네북 신세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사라진 '거대한 퇴행'의 시대에 비정한 국제정치가 뼈에 사무친다.

포퓰리즘과 국가 지상주의로 무장한 스트롱맨들이 세계를 활보한다. 트럼프가 앞서고 푸틴·시진핑·아베가 뒤따른다. 에너지 자급(自給)과 식량 자급을 이룬 최초의 세계 제국 미국이 자유무역의 최후 보루 및 세계 경찰 자리를 그만두면서 국제정치의 무정부 상태가 도드라진다. 기존 강대국이 신흥 강대국에 패권국의 지위를 순순히 넘겨주지 않는다는 교훈이 미·중 패권 경쟁의 천하 대란 가능성을 키운다. 보호무역주의가 확산할수록 국가의 역할도 커진다. 세계 자유무역과 세계화가 주권국가를 낡은 존재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전쟁을 할 수 있는 '정상 국가'를 노려 외교 문제를 경제 문제로 비화시킨 아베 총리가 한·일 분쟁의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일본에 기습당한 청와대와 민주당도 다음 총선과 대선을 겨냥해 관제 민족주의로 분쟁을 격화시켰다. 조국 청와대 전(前) 민정수석은 반일(反日) 감정을 격발시키는 SNS 정치로 적(敵)과 동지의 이분법을 극대화했다. 트럼프를 본뜬 청와대의 정치 공학은 적중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무능과 경제 실정(失政) 논란이 사라졌다. 대통령 지지도가 수직 상승하고 조 전 수석도 현실 정치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하지만 관제 민족주의로 문 정부가 얻은 정파적 이득은 대한민국의 국가 이익을 손상시킨다. 국가의 생존 가능성과 직결된 동북아 동맹 구조와 세력 균형을 해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국을 경영한 적이 없다. 한국과 이웃 강대국들을 가르는 심연이다. 미·중·일·러는 모두 세계 경영의 국가 대전략을 기획·실행했고 국제정치 전략 게임에 능숙하다. 이와 달리 한국인의 정치적 상상력은 한반도의 일국주의(一國主義)적 민족 감정에 제약된다. 유별나게 잔인했던 일제 식민 통치의 악몽이 저항적 민족주의를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에 새긴 결과, 민족주의가 한국 사회의 성배(聖杯)가 되었다. 우리가 일본의 도발에 격노하는 이유다.

민족주의는 남북 분단과 6·25라는 국제 내전(內戰)을 국제정치로 해석하지 않고 통일 민족국가의 실패로 읽었다. 그러나 '독립을 이루려면 통일이 불가능해지고, 통일을 실현하려면 전쟁이 불가피해지는' 분단 체제를 민족주의로 푸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네 마음의 습관은 국제정치를 선악 이분법으로 재단한다. 정말로 중요한 건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으로 이상(理想)과 현실을 통합하는 것이다. 한국은 2004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에 포함된다. 그것은 1998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맺은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 선언'이 낳은 한·일 상호 선린의 옥동자였다.

국가는 '특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폭력을 독점한다.' 국가는 폭력 독점의 주체이지만 그 폭력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정의를 지향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와 폭력의 관계에 거부감을 떨치지 못한다. 권위주의 독재국가가 남긴 상처 때문이다. 주권재민을 이룬 선진 민주국가의 성취조차도 국가의 '힘', 즉 정당한 폭력 위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21세기 동북아 국제정치의 소용돌이가 국가의 본질을 증명한다.

혈통과 문화를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는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트린다. 문 정부의 민족주의가 대한민국의 근본 가치를 넘어 북한에 매달릴 때 국가의 본질이 훼손된다. 정의(正義)를 다투는 남북 두 주권국가의 쟁투(爭鬪)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지만 우린 공존을 모색한다. 정의와 힘의 모순적 복합체인 국가는 동맹 관계와 세력 균형 위에서 평화 공존을 지향한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 기초한 한·미·일 간 협력과 공조는 지난 반세기 이상 동북아 평화와 번영의 토대였다. 국제 평화는 이성적 국가 철학의 틀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게 문재인 정부가 지켜야 할 대한민국의 근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