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조국 사태' 만든 文, 사과 한 마디에 남 탓 열 마디
조선일보 2019.10.15. 03:20조국 법무부 장관이 임명 35일 만에 사퇴했다. 8·9 개각 이후 두 달 넘게 이어진 '조국 사태'가 외형상 일단락됐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오래 끌어올 일이 아니었다. 조씨와 그 가족을 둘러싼 위선과 특혜, 반칙, 파렴치 의혹은 대한민국 장관에게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하물며 그런 사람에게 법과 규범을 세우고 정의를 실현해야 할 법무부 장관 자리를 맡긴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보수, 진보 정파를 따질 것 없이 과거 정권이었으면 진작에 조씨에 대한 장관 지명이 철회됐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조씨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국민이 참을 수 있는 인내의 한계를 벗어났다. 수사 권한이 없는 국회 인사청문회 절차에선 위법 여부가 가려질 수 없다. 그런 사정을 잘 아는 대통령이 '증거가 없다'는 식의 궤변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조국과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임명을 밀어붙인 것은 한국 대통령제의 권한과 책임에 심각한 허점을 드러낸 사례다.
민의(民意)와 상식을 거스른 대통령의 조씨 임명은 나라를 내전 상태로 몰아갔다. 휴일마다 서울 광화문에선 조국 사퇴, 서초동에선 조국 수호를 외치는 함성이 엇갈려 터져 나왔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말을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민심이 갈가리 찢겼다. 대통령이 임명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은 죽기 살기 싸움을 벌여야 했다. "법무부는 법무부 일을, 검찰은 검찰의 일을 하면 된다"는 대통령의 말도 안 되는 책임 회피가 자초한 일이다.
조국 사태가 남긴 상처는 조씨 사퇴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대통령은 반칙과 특혜로 살아온 사람에게 법무부 장관 임명장을 줬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대통령의 취임 전 약속은 이제 희극적 대사가 됐다. 문 대통령은 광화문에 모인 수십만 국민의 목소리는 못 들은 척하면서 서초동의 '검찰 개혁' 주장만 받들었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한 분 한 분도 국민으로 섬기겠다"던 취임사도 휴지 조각이 된 것이다. 대통령은 검찰 수사까지 짓누르고 윽박지르며 조씨 일가를 감쌌다. 국민은 대통령이 저렇게까지 하는 데는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하게 됐다.
문 대통령은 조씨 사퇴 직후 "국민 사이에 많은 갈등을 야기한 점에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사과는 이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다음부터는 전부 남 탓이다. 조국이 없으면 검찰 개혁이 안 되는 듯이 말했으나 한국 검찰 개혁의 핵심은 검찰을 대통령의 충견에서 국민의 충견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그러려면 대통령이 검찰 인사권을 내려놓으면 된다. 문 대통령은 이 일은 절대로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검찰 개혁을 말한다는 것은 변죽만 울리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심지어 조국 사태를 보도해온 언론에 '성찰'을 요구했다. 지금 정권의 응원단인 KBS와 한겨레신문에서조차 조국의 문제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고 일선 기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은 KBS와 한겨레신문 기자들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건가. 성찰은 무능한 국정과 이해할 수 없는 아집으로 나라와 국민을 힘들게 만든 문 대통령이 해야지 왜 기자들이 해야 하나. 지금 남 탓할 처지인가.
조씨 사퇴와는 별개로 조씨 일가에 대한 의혹은 엄정한 수사를 통해 시시비비가 가려져야 한다. 조씨가 사퇴했다는 이유로 수사가 흐지부지돼 버린다면 검찰 수사는 정당성을 잃는다. 정권이 이를 노릴 수도 있다. 이런 자세가 검찰 개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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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확대경]'너는 어느 편이냐' 묻는 말들
이데일리 2019.10.15. 06:19영국 만화가 윌리엄 힐이 1915년 미국의 한 유머 주간지에 `내 아내와 장모`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이 삽화는 어찌 보면 고개를 돌린 젊은 여자이기도 하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파의 얼굴로 보이기도 한다. 둘 중 하나를 본 뒤에는 쉽사리 다른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1930년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자 에드윈 보링이 지각의 애매모호함을 보여주는 예로 논문에 소개하면서 `보링의 인물`(Boring figure)로도 불린다. 선택적 지각에 따른 일종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지난 8월27일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검찰이 조국 법무부 장관 일가(一家)에 대한 강제수사에 돌입한 지 한 달여, 장관 후보자 지명과 인사청문회까지 감안하면 `조국 정국`이 두 달 넘게 이어졌다. 한 쪽은 검찰권을 남용한 `가족 인질극`이라 윤석열호(號) 검찰을 비난하고 다른 쪽은 “사익만을 쫓아온 위선자”라며 조 장관 일가를 `가족 사기단`으로 몰아세운다. 민심은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뉘어 두 동강 났고 주말마다 `조국 수호와 `조국 사퇴`를 외치는 세(勢) 대결 양상의 골은 깊어졌다.
온 나라가 조국 정국에 매몰된 사이 한일 갈등, 경제 양극화, 북핵협상 교착 등 대내외 중차대한 문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20대 국회 마지막 국정감사는 `조국 국감`으로 변질됐고 경제·민생 관련 법안들은 `조국 블랙홀`에 갇혀 제대로 된 논의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다. 대의 정치가 실종된 자리엔 상대를 향한 증오와 비난, 편가르기만 난무하고 있다. 공정 보도의 상징처럼 환호를 받다가도 유불리에 따라 한순간에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돼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실정이다. 진영 간 극단적인 싸움에서 논리와 이성은 사라지고 생산적인 토론 대신 극단의 언어와 주장들만이 판친다.
김훈 작가는 산문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란 책에서 “전면전을 치르는 말들의 신기루가 당대 현실 위에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아무 것도 소통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작가가 꼬집은 한국 사회의 세태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문제는 조국 정국 이후다. `너는 어느 쪽이냐`며 가르고 나누는 정쟁이 계속되는 한, 국민통합은커녕 민생경제를 회복하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총력 대응을 해도 헤쳐나가기 어려운데 경제는 버려지고 잊힌 자식이 됐다”고 울분을 토했던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비롯한 경제단체장들은 직접 해외로 나가 경제 살리기 해법 마련에 애면글면 하는 실정이다. 척박한 삶의 현실에 맞닥뜨린 사람들에게 `우리`로 뭉뚱그린 편가르기는 사치일 뿐이다. 하루하루 버티기조차 버거운 이들은 냉소와 절망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서로가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 외치지만 이 때의 국민이 과연 개별적 삶의 구체성에 천착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정치적 욕망이나 이득에 동원하는 수단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닐까. 여야 정치권은 이제 외눈박이 시선에서 벗어나 민생을 살피고 국가적으로 더 중요한 사안을 챙길 때다. 모든 것을 조국 정국 후순위로 미뤄둔 잃어버린 시간은 두 달로 충분하다.
이성기 (beyond@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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