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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51] 징비록(懲毖錄)

바람아님 2014. 1. 11. 11:15
(출처-조선일보 2012.02.24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임진란의 전후 사정을 기록한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을 다시 꺼내 읽어본다. 420년 전에 겪은 국난(國難)을 되새겨 보노라니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십여일 동안에 세 도읍(한양·개성·평양)이 함락되었고, 온 나라가 무너졌으며, 이로 인해 임금은 마침내 파천(播遷)까지 한" 상황에서 조정의 중추를 담당했던 서애(西厓) 유성룡이 '시경(詩經)'에서 말한 대로 '지나간 일을 징계(懲)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는(毖)' 의미로 쓴 글이 '징비록'이다.


조정에서는 1590년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왜국에 통신사로 보냈다. 돌아온 두 사람은 정 반대되는 보고를 했다. 황윤길은 머지않아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고했지만, 김성일은 "신은 그런 기미는 보지 못했습니다"하고 보고했다. 장차 정말로 병화가 일어나면 어떻게 하려느냐는 유성룡의 질문에 김성일은 이렇게 답한다. "나 역시 왜국이 끝내 동병(動兵)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오. 하지만 황윤길의 말이 하도 과격해서 안팎 인심이 동요되겠기로 일부러 한 말이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임진년 봄, 변방을 순회하고 돌아온 신립(申砬)에게 유성룡이 묻는다. "나라에 곧 변이 있을 듯 싶소. 그때에는 그대가 군사 일을 맡아봐야 할 텐데,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넉넉히 막아낼 자신이 있으시오?" 신립은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그까짓 것쯤 걱정할 게 없소이다." 왜병이 조총을 가지고 있다는데 어떻게 만만히 볼 수 있느냐고 묻는데도 그는 태연하다. "왜병들이 조총은 가졌지만 그게 쏠 적마다 맞는답디까?"

왜선(倭船)이 까맣게 바다를 덮은 채 부산에 밀려온 4월 13일, 부산 첨사 정발은 절영도에 사냥을 나갔다가 이 말을 듣고 허둥지둥 성으로 돌아왔지만 삽시간에 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적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사방으로 진격해 올라왔다. 조정에서는 급히 순변사와 좌방어사, 우방어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순변사를 맡은 이일이 서울에 있는 '정병(精兵)' 300명을 거느리고 가고자 했다. 그런데 병조에서 뽑았다는 그 정병 300명이란 민가나 시정(市井)에 있는 사람들, 혹은 서리나 유생들이었다. "유생들은 모두 관복에 책을 옆에 끼고 있었고, 서리들도 모두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군사로 뽑히기를 꺼리는 사람들이었다."

서애(西厓)는 우리가 얼마나 정세에 어둡고, 준비에 소홀하고, 내분에 싸여 있었는지 여실히 기록을 남겼다. 그가 살아 돌아와 오늘 우리의 상황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