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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52] 성인식

바람아님 2014. 1. 12. 10:27

(출처-조선일보 2012.03.02 주경철 서울대교수·서양근대사)


시종의 신분에서 정식 기사로 승격하는 서임식(investiture)은 유럽의 기사(騎士)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다. 기사 후보는 의식이 거행되기 전날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교회에서 선 채로 밤을 지새우며 훌륭한 기사가 되겠다는 기도를 올렸다. 서임식 당일에는 신분이 높은 영주나 주교가 주례를 맡아 의식을 거행했다.

시종이 엄숙한 분위기에서 수여받은 자신의 칼을 공중에 몇 번 힘차게 휘두르고 나면 주례는 그에게 평화의 키스를 한 다음 손을 활짝 펴서 그의 머리나 목덜미를 때린다. 그러고는 칼의 납작한 칼날 부분을 시종의 어깨에 세 차례 대는 도례(刀禮)를 행한다. 이 마지막 부분은 아마도 상징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동안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던 시종은 손바닥과 칼에 맞아 죽고 이제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정식 기사로 거듭나는 것이다.

기사 서임식은 일종의 성인식이라 할 수 있다. 세계 각지의 성인식은 대개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띤다. 예컨대 티에라 델 푸에고 지역의 오나족 사례를 보자. 성인식을 치를 아이들은 외딴집에서 무서운 형상의 마스크를 한 존재들과 만난다. 이들은 아이들을 처벌하는 신들로 알려져 있다. 그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아이들에게 싸움을 건다. 신은 아이들을 거의 때려눕히지만 막판에 아이들이 이기도록 놔둔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신이 눌러 이긴 신들의 마스크를 벗겨 자기 얼굴에 쓴다. 이제까지 자신을 억누르던 힘의 상징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아이는 당당히 어른으로 성장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식의 통과의례가 사라진 것 같다. 과거 우리의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冠禮)는 거의 맥이 끊겼다. 정식으로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의식을 경험하지 못한 결과 오늘날 많은 청년들은 유치한 놀이와 게임을 계속하는 '나이 든 어린이'처럼 되고 말았다. 어른이 되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죽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입학식 철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대학에 들어오지만, 과거와 달리 대학생들 중에도 여전히 '엄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학생들이 너무나 많다. 스물이 넘어서까지 계속 챙겨주는 부모는 사실 아들과 딸에게 엄청난 짐이 되어 성숙을 막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동안 고생한 학부모들부터 여유와 자유로움을 찾고, 그럼으로써 학생들에게 스스로 새로운 자아를 키울 수 있는 정신적 자유를 허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