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더 컨덕터'라는 영화를 봤다. 온갖 역경을 뚫고 1938년 여성으로는 처음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안토니아 브리코의 삶을 그린 영화였다. 주연 배우의 지휘 솜씨가 어색한 게 흠이었지만 철저하게 권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지휘자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잊히지 않는 대사 한마디…. "당신이 눈을 감고 그저 음악만 들으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사람이 여자라는 걸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브리코가 지휘자 세계의 유리 천장에 금을 낸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 지휘자들은 여전히 변방을 맴돌고 있다. 2007년 마린 올솝이 메이저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선임됐을 때 언론이 퍼부은 악담을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6년 후 그는 여성으로는 처음 프롬스(The Proms)에 초대받아 실력과 매력을 아낌없이 뽐냈다.
연세대 음대를 졸업한 지휘자 김은선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96년 역사에 첫 여성 음악 감독으로 임명됐다. 규모나 명성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버금가는 세계적 오페라단을 30대 후반 한국 여성이 지휘하게 됐다. 첼로 연주로 세계적 반열에 오른 장한나는 2007년 지휘로 전향해 지금 100년 전통의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 2003년에 출간한 '여성 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에서 나는 여성 시대 도래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줄 직책으로 주요 일간지 주필, TV 뉴스 단독 앵커, 메이저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꼽았다. 이 셋 중에서 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남성들이 제일 내놓기 싫어할 자리라고 생각한다. 겨우 10g 남짓한 지휘봉을 들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그 많은 소리를 죽이고 살리며 그야말로 무소불위 권위를 휘두르는 지위가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을까? 김은선과 장한나의 세계에는 천장이 없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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