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생 100주년 맞은 박수근
가족·이웃 등 일상 주로 그려, 가난한 삶… 死後 재평가 받아
100주년 기념행사 곳곳서 열려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촌부(村婦)가 절구질하는 그림이었다. '선전(鮮展)'에 입선한 그림이라고 했다. 당시
내가 일제강점기의 관전(官展)을 그렇게 대단하게 여겼던 것 같진 않다. 그러나 간판장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는 박수근(朴壽根·1914~1965) 20주기 기념 화집에 이렇게 썼다. 박수근은 1950년대 초 미8군 PX에서 초상화 그리는 일을 했고, 박완서는 그 초상화 주문을 받았다. '서울대생' 박완서가, '간판장이' 박수근을 다시 보도록 한 그 그림은 선전 제15회 입선작인 '일하는 여인'(1936·수채화), 혹은 제17회 입선작 '농가의 여인'(1938·유화)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두 점 모두 행방을 알 수 없다.
올해는 박수근 탄생 100주년. 한층 숙련된 40세의 박수근이 그린 '절구질하는 여인'(1954)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명화를 만나다-한국 근현대회화 100선'전에 걸려 있다. '절구질하는 여인'은 박수근이 즐겨 그린 주제. 1940년 결혼 이후엔 아내가 화폭으로 들어왔다. "아버지와 엄마는 이웃에 살면서 담 너머로 눈이 맞았대요. 부잣집 딸인 엄마가 '나는 죽만 먹고 살아도 믿는 사람에게 가겠다'고 고집 부려 이루어진 혼사였죠. 그렇게 와준 엄마가 절구질하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어요." 박수근의 맏딸 인숙(70)씨의 이야기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는 박수근(朴壽根·1914~1965) 20주기 기념 화집에 이렇게 썼다. 박수근은 1950년대 초 미8군 PX에서 초상화 그리는 일을 했고, 박완서는 그 초상화 주문을 받았다. '서울대생' 박완서가, '간판장이' 박수근을 다시 보도록 한 그 그림은 선전 제15회 입선작인 '일하는 여인'(1936·수채화), 혹은 제17회 입선작 '농가의 여인'(1938·유화)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두 점 모두 행방을 알 수 없다.
올해는 박수근 탄생 100주년. 한층 숙련된 40세의 박수근이 그린 '절구질하는 여인'(1954)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명화를 만나다-한국 근현대회화 100선'전에 걸려 있다. '절구질하는 여인'은 박수근이 즐겨 그린 주제. 1940년 결혼 이후엔 아내가 화폭으로 들어왔다. "아버지와 엄마는 이웃에 살면서 담 너머로 눈이 맞았대요. 부잣집 딸인 엄마가 '나는 죽만 먹고 살아도 믿는 사람에게 가겠다'고 고집 부려 이루어진 혼사였죠. 그렇게 와준 엄마가 절구질하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어요." 박수근의 맏딸 인숙(70)씨의 이야기다.
박수근이 자기가 살던
서울 창신동 풍경을 그린 '골목안'(1950년대), '빨래터'(1954), '농악'(1962), '행인'(1964) 등 '대표작 중의 대표작'
다섯 점이 이 전시장에 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질박함이 곧 박수근의 삶이자 예술이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학력의 전부, 그림은 독학(獨學)했다. 생활은 늘 궁핍했다.
"자기의 온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옆구리에 낀 채 싸게라도 팔아보려고 거리를 헤매던 모습을 보았다." 박완서의 회고다. 수술비가 없어 백내장을 방치했고, 결국 1963년 왼쪽 시력을 잃었다. 작품 '행인'은 오른쪽 눈만으로 분투하며 그린 그림이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이 말을 남기고 1965년 5월 6일 간경화로 임종했다.
그는 떠났지만 세상은 그를 오래 기억한다. 미8군 초상화부 시기의 삶은 박완서 소설 '나목(裸木)'(1970)으로 남았다. 2007년엔 작품 '빨래터'(1950년대 말)가 45억2000만원에 팔리며 한국 작가 경매가 최고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국내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호당 가격이 가장 높았던 작가(2억9917만원)도 바로 그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행사가 마련됐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질박함이 곧 박수근의 삶이자 예술이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학력의 전부, 그림은 독학(獨學)했다. 생활은 늘 궁핍했다.
"자기의 온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옆구리에 낀 채 싸게라도 팔아보려고 거리를 헤매던 모습을 보았다." 박완서의 회고다. 수술비가 없어 백내장을 방치했고, 결국 1963년 왼쪽 시력을 잃었다. 작품 '행인'은 오른쪽 눈만으로 분투하며 그린 그림이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이 말을 남기고 1965년 5월 6일 간경화로 임종했다.
그는 떠났지만 세상은 그를 오래 기억한다. 미8군 초상화부 시기의 삶은 박완서 소설 '나목(裸木)'(1970)으로 남았다. 2007년엔 작품 '빨래터'(1950년대 말)가 45억2000만원에 팔리며 한국 작가 경매가 최고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국내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호당 가격이 가장 높았던 작가(2억9917만원)도 바로 그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행사가 마련됐다.
서울 관훈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는 오는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린다.
유화 90여점, 수채화 및 드로잉 30여점 등 120여점이 나온다.
'고목과 행인'(1960년대), '귀로'(1964) 등이다.
박수근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선 다음 달 27일 100주년 기념식,
5월 3일~8월 3일 특별전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