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한겨레21 2008년08월20일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조선시대의 교육 1번지는 어디였을까? 두말할 나위 없이 현재의 서울 종로구 명륜동 일대였다. 이곳은 당시 반촌(泮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반(泮)이란 글자는 국학(國學)을 뜻하므로 현재의 대학가라는 말과 통한다.
유일한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있었고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文廟)가 있었기에, 각종 경제적 혜택이 주어졌다. “반촌은 문묘의 행랑”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문묘에 적용되는 치외법권적 권위가 확대돼 이 일대는 형리가 마음대로 출입하며 범인을 색출하지도 못했다.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
반촌, 교육특구의 지위와 명성
조선 500년 동안 성균관을 거쳐 과거에 급제하는 길이 거의 유일한 성공의 길이었다.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공인받은 정규 코스를 거치지 않고 다른 길을 밟아 고관에 이르기 어려웠다. 그런 만큼 성균관과 과거급제는 개인과 집안의 성공을 보장하는 제도였고, 당연히 온갖 부패의 온상이었다. 그 실태의 구구한 내용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그냥 넘어가자. 어쨌든 성균관 일대는 조선시대 유일의 고등교육기관이 위치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교육특구로서 지위와 명성을 누렸다.
당연히 이곳은 훗날 이름을 천하에 떨친 수많은 인재들이 거쳐갔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인재들의 전당인 이 반촌에 성균관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설 교육기관이 들어섰다. 송동(宋洞)이란 곳에 정학수(鄭學洙)란 사람이 서당을 차린 것이다.
송동은 당시 행정구역으로 숭교방(崇敎坊)에 속했고, 현재의 명륜동과 혜화동에 걸쳐 있다. 송동은 어떠한 곳인가? 효종 때의 정승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산 곳이라고 해서 송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 옆에는 그의 정적인 윤휴(尹携)가 산 포동(浦洞)이 있었다. 우암 본인과 당시 사람들이 송동이란 지명을 사용했으므로, 우암이 살았기에 송동이라 부른다는 설은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어쨌든 18세기 이후로 송동은 우암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굳어졌다. 송동은 또 봄철 복숭아꽃을 감상하는 한양의 대표적 유원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조선 후기부터 구한말까지 친구들과 어울려서 이곳을 찾아와 노닐고 시를 남긴 상춘객이 부지기수다.
우암의 전설이 여전히 강하게 살아 있는 이 송동에 정학수란 인물이 개인 서당을 차린 것이다. 정학수는 대체 누구일까? 그에 관한 기록은 <추재기이>를 제외하면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자세한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겨우 심로숭(沈魯崇)의 <산해필희>(山海筆戱)와 <승정원일기> 등을 참고해 대략만 짐작할 수 있다. 심로숭이 남긴 기록에는 그를 반촌 사람이라고도 했고, 또 수복(守僕)이었다고도 했다. 성균관 수복은 바로 문묘를 지키는 노비로서 제사와 청소 따위의 일을 맡은 사람이었다.
신분은 노비이지만 가장 낮은 직급의 관원이었다. 심로숭의 기록은 <승정원일기>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정조 원년에 역적 토벌을 상소한 성균관 전복(典僕) 100여 명의 이름 가운데 정학수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 이해 겨울에 다시 반예(泮隸)인 정학수를 감옥에서 방송(放送)한다고 나와 있다. 전복과 반예는 수복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 정학수가 반촌에 사는 사람을 위해 서당을 열었다.
문제는 그 규모가 일반 서당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추재기이>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성균관 동쪽은 바로 송동(宋洞)이다. 이 동네에는 꽃과 나무가 매우 많은데 그 가운데 강당(講堂)이 드높게 서 있다. 바로 정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아침저녁으로 경쇠를 울려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불러모으고 흩어지게 하였다.”
경치가 아름다운 혜화동 골짜기에 정학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큰 규모의 강당을 세웠고,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어 그는 아예 경쇠를 울려서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려야 했다. 마치 현재의 학교에서 종이나 벨을 울리는 것과 비슷하다. 학생 수가 많지 않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정학수의 서당은 꽤 큰 규모로 학교나 학원의 체제를 갖춘 번듯한 교육기관이었으리라. 보통 서당은 개인 집 사랑방에 여는 소규모 학교인 반면, 정학수는 집을 번듯하게 크게 짓고서 많은 학생들을 받았다. 강당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학수가 세운 강당 건물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을까? 종로구에 있는 서울과학고등학교 서쪽 명륜동 1가 2-24번지 일대에는 거대한 암벽이 있다. 그 바위 위에 ‘증주벽립’(曾朱壁立)이란 우암 친필 글씨가 각자(刻字)돼 있다.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처럼 우뚝 서겠다는 의미의 글씨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호이다. 이 글씨는 그 아래에 우암의 집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바로 우암의 글씨가 있는 이 바위 아래에 정학수가 강당을 세웠다.
서당터에 보성고·서울과학고 들어서
그런 추정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20년 넘게 성균관에서 공부했고, 나중에 그 체험을 220수의 ‘반중잡영’(泮中雜詠)이란 연작시로 남긴 윤기(尹愭·1741~1826)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반수(泮水)의 동북쪽에는 이른바 송동이란 곳이 있다. 조용하고도 경치가 빼어나다. 흰 바위가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고 여기에 ‘증주벽립’이란 큰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반촌 사람인 정조윤(鄭祚胤)이 그 아래에 집을 짓고 또 서당(書堂)을 만들어서 학도들을 교육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가서 노닐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내용은 정학수의 활동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이러한 묘사에 부합하는 사람으로 정학수를 제외하곤 생각하기 어렵다. 정조윤의 이름만 정학수로 바꾸면 된다. 정조윤은 정학수의 자이거나 이름을 잘못 들어 오기한 것이리라. 윤기가 성균관에 재학할 때의 일임을 감안하고, 정학수를 찾아간 또 다른 시인 신광하(申光河·1729~96)의 생존 연대와 비교해보면, 바위 아래에 서당을 짓고 교육활동을 한 사람은 동일인이다. 이 두 시인이 정학수를 만난 연대는 1770~80년대일 것이다.
‘증주벽립’ 각자가 있는 바위 아래에 서당을 지었음을 윤기의 기록은 확인해준다. 정학수는 바로 우암 송시열의 집터에 자신의 집과 서당을 세웠다. 그런데 정학수가 서당을 세웠던 곳에는 1925년에 보성고등학교가 건립됐고, 1987년 보성고가 방이동으로 이전한 뒤에는 서울과학고등학교가 들어섰다. 공교롭게도 그가 서당을 세운 곳이 근대 이후에는 명문 고등학교의 학교 부지로 계속 사용됐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매우 흥미롭다.
정학수는 신분이 노비였다. 수복이 일반 노비와는 처지가 다르다고는 해도, 아무리 우대해봐야 일반 사대부와 동등하지는 않다. 양반 사대부가 아니었지만 정학수는 당시에 교육자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조수삼은 그를 두고 “그의 문하에서 학업을 성취한 자가 많아 반촌 사람들이 그를 정 선생이라고 칭송하였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서 사설 서당이 일반 백성 교육을 담당하며 급속도로 확산됐다. 대부분 훈장이 개인 자격으로 설립했다. 서울에서는 중인 계급들이 이러한 교육에 열정을 보여 유명한 훈장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몽리(李夢鯉)나 신의칙(申矣則) 같은 중인 계층 인물이 정학수 당대에 훈장으로 유명했다. 이들은 학도들이 예법을 잘 지키고 스승을 잘 따르도록 유도한 훌륭한 스승으로 인정받았다. 이런 사설 서당은 교육 기회가 미치지 않는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교육을 제공했다. 정학수는 서울의 수많은 서당 가운데서도 규모가 가장 큰 서당을 운영하는 훈장이었다고 추정된다.
정학수가 신분이 낮고 서당의 훈장에 불과했으나 많은 학생을 가르치고 규모가 큰 서당을 유지할 정도면, 당시 사대부와 긴밀한 교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 가운데 앞서 언급한 윤기가 있고, 신광하란 시인이 있으며, 또 정학수의 위상을 잘 이해한 사람에 심로숭이 있다.
윤기가 성균관에서 지내다가 한가한 틈을 타서 친구들과 정학수 서당을 찾아가 시를 지은 것처럼, 신광하도 성균관 재학 중에 정학수 서당을 찾았다.
저명한 시인인 신광수의 아우이자 그 자신도 유명한 시인인 신광하는 여가를 이용해 정학수의 서재를 찾아가 이런 시를 읊었다.
잔설 남은 솔 숲길에 오솔길 나뉘고
서재의 경전 읽는 소리 멀리서도 크게 들리네.
주인은 서둘러 뛰어나와 계곡으로 내려오고
제자들은 문을 열고 흰 구름을 쓸고 있네.
송동(宋洞)을 이젠 정곡(鄭谷)이라 불러도 무방하리
곽태(郭泰) 같은 은사라야 모군(茅君) 같은 신선을 만나지.
산집에 봄빛이 먼저 찾아들지 않으련만
복사꽃 살구꽃 천 그루는 벌써 피려 하네.
멀리서도 서당방 글 읽는 소리가 들리고, 정학수가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며, 제자들이 숲에 낀 흰 구름 속에서 빗질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산비탈에 있는 옛날의 서당방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시이다. 그 다음, 이곳이 과거에는 송시열이 살았기에 송동이라 불렸으나, 이제는 정학수가 서당을 지어 교육하므로 정곡으로 불러도 좋겠다고 했다. 이 골짜기의 상징이 우암에서 정학수로 바뀌었다고 한 것이다. 자신과 정학수를 중국의 유명한 은사와 신선으로 견주어보는 호기도 부렸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쳐도, 교육자로서 정학수의 위상을 대단히 크게 평가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시가 나오기 어렵다.
정학수 예찬하다 성균관 쫓겨나
그런데 신광하가 쓴 이 시가 큰 문제를 일으켰다. 성균관의 서재(西齋)에 기숙하는 유생들이 이 시를 보고서 우암을 모욕했다고 하여 신광하를 쫓아낸 사건이 일어났다. 송동을 정곡으로 바꿔도 되겠다는 시구가 우암을 모욕했다고 노론 학생들은 느꼈다. 당시 성균관에서는 노론은 서재에, 소론과 기타 당파 학생은 동재에 기숙했다. 신광하는 남인이었다. 당시 성균관의 여론을 주도하던 노론 학생들이 그를 성토해 성균관에서 축출했다. 시 한 구절 잘못 써서 퇴학당한 것이다.
쫓겨난 신광하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강 나루터에 이르렀다. 마침 뱃사공을 송가(宋哥)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광하가 뱃사공에게 물었다.
“네 성이 무엇이냐?”
“송가입니다.”
그러자 신광하가 대뜸 그를 꾸짖었다.
“내가 송이라는 글자 하나를 잘못 시에 써서 성균관에서 쫓겨났거늘, 네가 감히 우암의 성을 성으로 썼단 말이냐?”
그때 배 안에 노론 출신 진사가 있었다. 신광하는 이렇게 뱃사공을 꾸짖어서 분풀이를 했다.
위의 일화는 심로숭의 문집에 나온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송동이란 지명이 원체 자랑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하필이면 다른 학자도 아닌 성균관 수복이라는 미천한 신분의 서당 훈장을 치켜세워서 정곡이라 바꿔 불렀으니 화를 단단히 돋울 만도 했다. 그러나 심로숭은 송동이니 정곡이니 하는 지명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지은 시에서 선현을 모욕할 의도를 담지는 않았을 텐데 노론 선비들이 과민반응을 보였다고 보았다. 결국 신광하의 축출은 역으로 우암을 욕보이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이런 일화도 정학수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서당 훈장이었음을 넌지시 말해준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정학수는 한 시대 최고의 학원 강사였다고 평가하면 지나친 것일까? 그런 교육자에게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좋은 평가는커녕 아무런 언급도 남기지 않았다. 같은 수준으로 인정하기를 꺼렸다.
조수삼이 교육자로서 그의 인물됨을 예찬한 다음 시가 거의 전부라고 해야 하리라.
꽃과 나무 아래
강당으로 가는 길이 나 있거니
저녁 되고 아침 되면
경쇠 소리 들으며 학생들 오가네.
사방의 훌륭한 인재를
교육하는 분은 누구인가?
품이 넓은 두루마기에 큰 띠 두른
정 선생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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