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바이스, 석문24경, 체루취적도, 1910 |
“그렇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베이징예술전문학교 교장 쉬페이홍(徐悲鴻·1895~1953)이 지인의 초대로 전시장에 갔을 때였다. 전시장에는 베이징 화단을 대표할 만한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한결같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어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실망한 그는 서둘러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사람들 눈이 거의 닿지 않는 구석에 걸린 그림 한 폭이 눈에 띄었다. 새우 몇 마리가 헤엄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는데, 소재도 참신하고 능숙한 붓놀림이 마치 물속의 새우가 금세 튀어나올 것처럼 기운생동했다. 흥분한 쉬페이홍이 구입 의사를 밝히는 붉은 띠를 걸려고 하자 곁에 있는 지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은 것이다.
“작가가 나이도 많은 데다 베이징 화단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골 목수 출신입니다. 그런 사람의 작품을 사시겠다니 선생님답지 않으십니다. 선생님 명성에 누가 될 수도 있으니 다시 한번 신중히 고려해보시지요?”
“무슨 소린가? 나는 이 작가를 우리 대학의 교수로 초빙할 생각이네.”
1929년 가을의 일이었다.
치바이스와 쉬페이홍
그로부터 82년이 지났다. 눈밝은 쉬페이홍의 천거로 시골 목수에서 일약 베이징 화단의 총아로 부상한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는, 2011년 세계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작가가 됐다. 그의 작품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는 베이징의 자더(嘉德)경매에서 5720만달러(약 718억원)에 낙찰됐다. 2위는 원(元)나라 때 화가 왕멍(王蒙)의 ‘치천이거도(稚川移居圖)’가 차지했고, 쉬페이홍의 ‘구주무사낙경운(九州無事樂耕耘)’은 6위였다. 이는 파블로 피카소(7위)와 구스타프 클림트(8위), 에곤 실레(9위)와 앤디 워홀(10위)보다 훨씬 뛰어난 성적이었다. 현재 세계 미술시장에서 중국 미술품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반영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중국 작가들이 유럽과 미국의 ‘수퍼스타’를 물리치고 당당히 세계 미술계의 상층부로 급부상한 원인은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가치와 희소성 외에 구매자의 증가를 들 수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으로 신흥 부자들이 증가하고 예술 인구가 확대됐다. 높은 소득수준으로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된 부자들은 부동산과 주식투자를 넘어 자신의 품격을 과시할 수 있는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여기에 중국 경제의 가능성을 예측한 서양인들의 관심과 투자도 한몫했다. 중국 미술품은 이제 중국 내수시장을 넘어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최고가를 경신한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를 살펴보자. 축(軸)으로 된 이 작품은 가로 1m, 세로 2.66m로 두 그루 나무 위에 매가 그려져 있다. 작품의 좌우에는 간략한 전서체로 ‘인생장수 천하태평(人生長壽 天下太平)’이라고 적어 놓았다. 화제(畵題)를 전통적인 옛 그림과 달리 그림에 버금갈 만큼 크게 쓴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화제에 비하면 그림은 오히려 소략하고 담담하다. 이는 그림이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됐다기보다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춰졌음을 말해준다. ‘장수’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보통 사람들의 염원이라면, 천하가 ‘태평’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은 ‘영웅’의 몫이다. 영웅은 매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송백고립도’는 치바이스의 작품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점잖다. 지나치게 전통적이고 과거 형식에 안주한 듯한 혐의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의 작품은 ‘송백고립도’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생명력이 넘치고 참신하다.
독학으로 그림 공부
보수적인 베이징 화단에서는 치바이스를 받아주지 않았다. 파격적인 형식과 색감으로 무장한 시골 촌뜨기의 그림은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강고한 화단에서 철저히 외면받고 비난받았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쉬페이홍이 그를 발견할 때까지 10년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새로운 화법을 모색했다. 쉬페이홍이 구습에 물들지 않은 치바이스의 작품을 보고 ‘중국 화단의 막중한 짐을 질 수 있는 한 필의 천리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60년 동안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밀고 나간 고집스러운 창작력 때문이었다.
쉬페이홍과 젊은 그들
장쑤성(江蘇省)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쉬페이홍 역시 어려서부터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수해로 13세 때 고향을 떠나 유랑생활을 한 그는 그림을 팔아 생활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서양화 복제품을 접하게 됐는데 동양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화려한 색채와 구도, 명암법에 의한 생생한 묘사에 깊이 매료됐다. 20세에 상하이로 떠난 그는 한 클럽에서 아편 침상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자고 그림을 그렸다. 말 그림을 잘 그려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그는 일본 유학을 다녀와 베이징예술대학의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베이징예술대학은 신문화운동의 주역인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교장이었는데 관료적이고 보수적인 학술 풍토를 혁신하기 위해 후스(胡適), 루쉰(魯迅), 천두슈(陳獨洙), 쉬페이홍 같은 젊은 교수들을 채용했다.
1927년 가을에 쉬페이홍은 32세의 나이로 프랑스에 유학을 떠나 8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중국적 소재를 서양화법으로 그렸다. ‘비사실적이고 여기(餘技)적인 접근’을 배격하고 정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철저히 사실주의적인 시각에서 그릴 것을 주장한 그의 회화관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서양화라는 그릇에 동양의 내용을 담는 ‘중서융합(中西融合)’의 태도를 버리고 수묵으로 전환했다. 그의 대표작 ‘우공이산(愚公移山)’은 서양화의 명암법과 해부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동양화의 필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는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는 특정한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각각의 장점만을 취할 줄 아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더불어 가능성이 있는 여러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할 줄 아는 참다운 교육자였다. 삶의 철학을 예술작품으로 구현해내고 다시 젊은 세대에게 전해준 쉬페이홍에 의해 현재의 중국 현대미술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치바이스 이후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미술시장은 지금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홍콩과 마카오, 대만에 이르기까지 주요 대도시에는 곳곳에 갤러리가 성업 중이다. 세계의 화상들은 ‘중국 현대미술 4대 천황’인 왕광이, 장샤오강, 팡리쥔, 웨민쥔의 작품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이들의 작품은 한국의 화랑가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개혁개방시대(1976~1989)를 거치면서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세계로의 전환을 경험한 젊은 작가들은 개인과 사회의 대립과 갈등, 인류 문명에 대한 비판과 고민을 중국적인 그릇에 담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중국 현대작가들의 작품에서 다른 나라 작가들이 함부로 모방할 수 없는 ‘중국’만의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20세기 초에 살았던 1세대들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외래문화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1세대의 고집이 있었기에 그 바탕 위에서 2세대는 마음껏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었다. 이것이 2세대의 작품값보다 1세대의 작품값이 더 높게 책정되는 근본 이유다. 이것이 또한 담담한 필치의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가 최고가를 경신하게 된 비밀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길, 장다첸과 리커란 중국 현대 산수화의 거장 리커란(李可染·1907~1989)은 치바이스나 장다첸과는 전혀 다른 길에서 중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 16세에 상하이사립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우창숴(吳昌碩·1844~1927) 계열의 그림을 배웠다. 21세 때는 차이위안페이가 설립한 서호국립예술원에서 린펑미엔(林風眠·1900~1990)을 만나 형상의 과학적인 관찰과 소묘의 사실적인 묘사방법을 배워 철저한 현장 스케치를 실천했다. 그에게 쉬페이홍과 치바이스와의 만남은 큰 자극제가 됐다. 치바이스의 필(筆)을 논하면서 ‘그의 선이 마치 현(弦)과 같다’고 감탄했다. 그는 오대(五代) 송(宋)대부터 전해오는 산수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그의 ‘이강산수’는 강한 먹빛과 힘찬 필치로 먹을 되풀이해서 쌓듯이 칠하는 적묵법(積墨法)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장다첸이 화려한 봄 산을 그렸다면 리커란은 녹음이 무성한 여름 산을 그린 듯 강렬하다. 그래서 리커란은 현대 화가 중에서 먹을 가장 잘 쓴 화가로 평가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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