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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50]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의 완성

바람아님 2020. 3. 11. 07:40

(조선일보 2020.03.11 김규나 소설가)


김규나 소설가

돼지와 개의 배급량은 그대로였지만 다른 동물들의 배급량은 또다시 줄었다.

배급량을 너무 평등하게 하는 것은 동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스퀼러는 설명했다.

물론 배급량을 재조정할 필요는 있지만(감축이란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식량 사정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며 존스 시대와 비교하면 사정이 훨씬 나아진 것이라고 했다.


―조지 오웰 '동물농장' 중에서



마스크 5부제가 시작된 월요일 오전, 약국 앞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금세 줄이 길어졌다.

약국 문이 열리고 10분 만에 대기표가 다 나갔단다. 오전 11시에 입고된다고 해서 다시 나갔는데 물량이 확보되지 않은 듯,

한참을 지켜보았지만 판매는 시작되지 않았다.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약국에서 팔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개인 사업자인 약사가

주민센터 공무원처럼 정부 지시를 받아 일하는 것도 이상하다. 기침하는 사람, 더 자주 외출하고 더 밀폐된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 등 개인에 대한 배려도 없다. 모두가 '평등하게' 일주일에 한 번, 최다 두 장이 허락될 뿐이다.


1945년에 출판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스탈린이 지배하던 소련의 참상을 고발한다.

가축들은 자유롭게 살아 보겠다며 농장 주인을 내쫓았지만 지도자를 자처하는 개와 돼지에게 훨씬 더 혹독하게

착취당한다. 배급량은 자꾸 줄어서 동물들은 헐벗고 굶주리다 병든 채 죽어 가는데 권력에 취한 개와 돼지는

검은 뒷거래로 부를 쌓고 파티를 즐기며 피둥피둥 살이 쪄간다.

궁금하다. 중국에 수많은 마스크를 지원한 정부도, 이 정책을 결정한 책임자들도 번호표 받고 주민증 보이고 자기 돈 내고

구매하는지, 청와대와 고위 공직자들은 약국 앞에 줄 서 본 적 있는지. 한 장도 사지 못해 돌아서며 허탈해 본 적 있는지.


한국인 입국 금지가 가져올 수출입 감소와 경기 침체에 따른 대형 마트 폐점이 이어지면 쌀과 빵, 고기와 야채,

분유와 기저귀를 사기 위해 요일별로 줄을 서고 신분증을 내밀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의 완성이 코앞에 닥쳤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10/20200310038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