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24. 8. 18. 05:00
■ 제 4부
「 〈제 4부〉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① 평양서 김구 맞이한 첫사랑…김일성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4116
② 아버지는 자결, 조부는 친일…北 택한 홍명희 ‘기구한 3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5569
③ 홍명희는 아들과 맞담배했다, 부자간 치열했던 ‘이념 논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215
④ 北이 꾸민 가장 기만적 모임…‘남북협상’ 비극으로 끝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8833
」
「 〈제4부〉 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
「 ①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협상
1948년, 해방된 지 3년이 지난 후였으니 한국인은 희망에 부풀어 있을 법도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유엔은 1948년 8월 15일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일정에 따라 5월 10일을 총선거 실시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남북한에 각기 다른 정부의 수립, 곧 분단을 확인하는 절차만이 남아 있었다. 더욱이 남한에서는 제주 4·3 사건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고 있어 좌우익 사이에는 적의가 팽배해 있었다.
1948년 연초가 되자 남북협상 문제가 해방정국의 새로운 이슈로 대두했다. 이 문제의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김규식(金奎植)이었다. 그리고 김구(金九)가 가세했다. 이 일련의 움직임은 단정파의 승리가 가져온 충격에 대한 반사작용이었다. 1948년 2월 23~26일, 입법의원에서 단독 선거를 40대 0으로 가결했다.
2월 8일에 김구와 김규식이 유엔한국위원단의 메논(K. P. S. Menon) 의장을 만나 남북 요인 회담을 제청했다는 사실이 정가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울 주재 소련 대표부를 경유해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협상을 제의하는 편지를 발송했다. 희망의 불씨인지, 체념인지 국민의 반응은 착잡했다. 당시 김구가 더 적극적이었다.
김구가 북행하던 4월 19일 오전 5시 반쯤부터 경교장(京橋莊)에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등 청년 학생 140여 명이 김구의 북행을 만류했으나, 김구는 “이번에 가서 성과가 없다면 차라리 3·8선에서 배를 가르리라”는 말을 남기고 평양으로 향했다.
김구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환영객 가운데 곱게 차린 한 할머니가 있었다. 낯이 익었다. 그 여인은 김구가 50년 전에 헤어진 첫사랑 안신호(安信浩)였다. 안창호(安昌浩)의 여동생이었는데 두 남녀는 결혼까지 마음먹고 사랑하는 사이였다....안신호는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김구는 상처를 입었고, 안신호도 상처를 보듬으며 두 남자가 아닌 제3의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북한이 그 여인을 환영객으로 내보낸 것은 김구의 연정(戀情)을 자극하려 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김정일은 영화 ‘위대한 품’(1986)에서 이 일화를 과장해 극화했다.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 대목을 거론하면서 “김구는 김일성·김정일에게 살아서도 이용당하더니 죽어서도 이용당했다”고 평가했다. 정치인에게는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 이제 돌아보면 김구의 북행은 가지 말았어야 할 길이었다.
https://v.daum.net/v/20240818050057017
"죽어서까지 이용 당했다"…김구 첫사랑 내보낸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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