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08.18 서울대 교수·서양미술사)
특히 매년 열리던 '르 살롱' 전시회는 국가가 주관하는 전시회로 여기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성공의 지름길이었다.
살롱전은 미술평론이 본격적인 분야로 발전하던 이 시기에 평론계가 주목하는 행사였다.
문인이나 기자, 학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평론가들이 살롱전 출품작에 대해 평을 썼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당시의 비평은 더 가차없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당시의 비평은 더 가차없었다.
미술의 개념이나 양식이 급격히 변화하던 당시, 마네나 세잔은 그들의 선구적인 면을 알아보지 못한 평론가들의 악평 때문에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쿠르베는 자신의 작품을 제외시킨 데 대한 반발로 1855년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장소 바로 앞에
가건물을 짓고 자신의 작품 27점을 전시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미국 태생으로 런던에서 활약하던 휘슬러는 더 강경했다.
그는 1877년 런던의 그로스브너 갤러리에서 '검은색과
황금색의 녹턴: 떨어지는 불꽃'이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젖은 화면 위에 물감이 착색되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섬세한 이 그림은 런던 야경의 황홀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그림은 회화란 더 이상 이야기를 보여주거나 사실대로
묘사할 필요 없이, 색채와 형태의 추상적 가치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휘슬러의 믿음을 반영한다.
이 개념은 당시 영국에서는 새로운 것이었다.
이 개념은 당시 영국에서는 새로운 것이었다.
평론가 존 러스킨은 사람들의 얼굴에 물감 냄비를
내던진 것 같은 그림의 가격이 200기니나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악평을 썼다. 휘슬러는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었다. 재판관이 이틀밖에 걸리지 않은 그림을
200기니나 받을 수 있느냐고 묻자 휘슬러는 200기니는
자신이 일생에 걸쳐 배운 지식에 대한 가격이라고 반박했다.
휘슬러는 승소했지만 손해배상으로 겨우 1파징(1/4 페니)을
받았을 뿐 소송비용 때문에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관습적인 방법에 반발하고 자유로운 예술 표현과
권리를 주장했던 휘슬러나 쿠르베는 그 이후의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게 선구적인 모델이 되었다.
'검은색과 황금색의 녹턴: 떨어지는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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