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09.17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명나라 오정한(吳廷翰·1491~1559)의 책상 옆에는 나무로 짠 궤 하나와 옹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책을 읽다가 의혹이 생기거나 생각이 떠오르면 얼른 적어 그 안에 담아 두었다.
역사책을 읽다가 일어난 의문은 항아리 속에 넣고, 경서를 읽다가 떠올린 생각은 궤에 담았다.
각각 상당한 분량이 되자 그는 이를 따로 엮어 책 한 권으로 묶었다.
옹기에 담긴 메모는 '옹기(甕記)'란 책이 되고, 궤에 든 쪽지는 '독기(櫝記)'란 책이 되었다.
중국 역사학자 이평심(李平心·1907~ 1966)은 오근독서법(五勤讀書法)을 강조했다.
중국 역사학자 이평심(李平心·1907~ 1966)은 오근독서법(五勤讀書法)을 강조했다.
독서에서 다섯 가지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가 꼽은 다섯 가지는
부지런히 읽고(근열독·勤閱讀), 부지런히 초록해 베껴 쓰며(근적록·勤摘錄), 부지런히 외우고(근기심득·勤記心得), 부지런히 분류해서(근분류·勤分類), 부지런히 편집해 정리해두는 것(근편사·勤編寫)이다.
그는 서재와 안방뿐 아니라 부엌과 화장실에까지 메모지가 담긴 작은 그릇을 놓아두었다.
책에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과 만나면 즉시 적어 그릇에 담아 두었다.
그는 이 그릇에 취보합(聚寶盒)이란 이름을 붙였다. 보물을 모아둔 그릇이란 의미다.
일정한 기간마다 그는 이 메모들을 꺼내 분류하고 정리해서 연구 자료로 삼았다.
갑골문과 고대 역사에 관한 수많은 저서가 모두 취보합의 메모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옛사람은 농사를 짓다가도 문득 공부나 문사에 관한 생각이 떠오르면 감나무 잎을 따서 거기에 얼른 적은 뒤 밭두둑 가에
묻어둔 항아리 속에 담아두곤 했다. 이덕무와 박지원은 이 일을 본떠 자신들의 평소 메모를 묶은 비망록 제목을
'앙엽기(盎葉記)'로 달았다. 그 뜻은 동이(盎) 속 잎사귀에 적은 메모라는 뜻이다.
생각은 원래 책상맡보다 화장실이나 침상 위에서 더 활발해진다.
생각은 원래 책상맡보다 화장실이나 침상 위에서 더 활발해진다.
떠오를 때 즉시 잡아두지 않으면 안개처럼 흩어진다.
느닷없이 왔다가 섬광처럼 사라지는 생각을 붙들자면 손 닿는 곳에 메모지와 필기구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기억보다 메모가 한결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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