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중앙일보 2014-12-15일자]
이홍구/전 총리·본사 고문
그러나 지금의 지구촌 사정을 살펴보면 어느 곳, 어느 나라도 편안한 데가 없다. 우리만이 겪는 불행이나 시련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큰 나라든 작은 나라든 어려운 역사의 고비를 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1945년 세계대전과 제국주의시대로부터 해방되며 유엔의 깃발 아래 출범한 새 국제질서에 인류는 큰 기대를 걸었었다. 냉전이 끝나고 민주화의 물결이 퍼져가던 90년, 독일 통일은 세계화시대에 걸맞은 새 질서 정착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는 또다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과 지정학적 충돌의 구시대적 혼란과 무질서 속으로 표류하고 있다. 세계화라는 역사의 큰 흐름이 심각한 시련에 부닥치고 있는 것이다.
덩샤오핑의 결단에 크게 힘입은 시장의 세계화는 지난 한 세대에 돌이킬 수 없는 진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발전 동력을 제공했던 세계화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불황과 빈부격차의 증대라는 두 개의 장벽 사이에 끼어 신음하고 있다. 또한 정보와 문화의 세계화 속에서 진전되던 민주화 및 사회발전과 평화적 국제관계 정립의 추세도 도처에서 역류에 부닥치고 있다.
오늘날 세계가 겪고 있는 혼란 속에서 가장 우려되는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이른바 강대국들이 직면한 시련과 이에 대응하는 그들의 능력 및 자세의 한계라고 하겠다. 강대국들이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제국에 대한 향수와 복고적 본능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세계는 또다시 강대국 간의 충돌로 이어질 수 있고 어렵사리 진행되어 온 세계화의 소득도 파탄의 위험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냉전의 승리로 유일 초강대국이 되었던 미국의 위치가 점차 흔들리는 추세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다만 대서양과 태평양을 두 날개로 가진 아메리카 대륙에서 다인종 이민국가로 자유개방사회를 지향했던 미국적 실험의 성패는 지구촌 세계화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세계적 불황 속에서 유독 회복의 기운을 보이는 미국 경제와 국제정치 리더의 대역(代役) 후보가 보이지 않는 현실이 미국의 위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냉전의 맞수였던 러시아의 경우에는 제국의 해체가 얼마나 크고 어려운 후유증을 남기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제국에 대한 향수와 부활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푸틴의 강수는 처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소련 해체 후 서유럽과의 완충지대에 위치한 국가들로 편입된 2500만 러시아인들의 운명에 대한 우려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제국의 시대로 시계를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중국의 꿈은 제국으로의 회귀라기보다는 중화의 중심이란 본연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미 시장의 세계화를 수용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이 미국과 구시대적 패권경쟁을 벌이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참여민주주의와 고도의 경제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을 주시하며 정보화 차원에서도 선진국을 자처하는 중국은 세계화의 다음 단계에 걸맞은 초강대국의 건설을 모색하지 않겠는가.
유럽의 리더라는 자리를 굳이 사양하며 신중한 행보로 나아가고 있는 독일은 물론이려니와 역사인식의 정리 작업을 아직 끝내지 못한 경제대국 일본도 제국시대의 미련보다는 세계화 과정의 동력이 재점화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위기의식을 갖고 새해를 맞게 되는 것이 오늘의 세계다. 험난한 국제환경에서 우리의 안보, 경제, 사회발전, 민족통일을 위해 계속 전진하려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꿈, 즉 비전이 있어야 한다. 20세기 전반에는 제국주의에 대항한 독립운동으로, 그 후반에는 시민과 민족의 자유를 추구하는 민주화운동으로 다진 우리 사회의 저력이 있지 않은가.
강대국의 세력독점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지구촌의 미래를 모두가 함께 열어가자는 이상주의와 수난의 역사로 다져진 현실주의를 동시에 포용하며 밝은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리자.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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