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책·BOOK

'영성가 김수환'과 함께한 일주일

바람아님 2015. 1. 9. 10:07

(출처-조선일보 2015.01.09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1999년 사제연수 강연한 내용 정리해 펴낸 책 '거룩한 경청'
사랑·고통·죽음·부활까지… 이야기하듯 전하는 신앙 고백


	'거룩한 경청'
"제가 나이를 좀 먹으니까요. 점점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떤 좋은 일도, 좋은 생각도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을 우리 마음속 작고 답답한 상자에 가둬놓고 있는지 모른다.
늘 그의 '사회적 발언'엔 귀를 쫑긋 세우면서 정작 그 바탕의 영성(靈性)엔 눈귀를 닫고….

최근 나온 '거룩한 경청'(여백)은 '영성가 김수환'의 내면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볼 기회다. 
책은 지난 1999년 5월 7일부터 14일까지 의정부에서 열린 사제들의 연례 피정(避靜·일상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에서 묵상·기도하는 수련)에 참석한 김 추기경이 하루 두 차례씩 12번에 걸쳐 강연한 내용을
정리했다. 직접 타이핑한 강연문에서 당시 팔순을 앞둔 노(老)추기경은 삶과 신앙의 정수(精髓)를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하듯 후배 사제들에게 전하고 있다.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1997년 영등포의 노숙인·행려인 무료 진료시설인 요셉의원 개원미사에 참석했을 때 모습.
 김수환 추기경이 1997년 영등포의 노숙인·행려인 무료 진료시설인
요셉의원 개원미사에 참석했을 때
모습. 김 추기경의 표정이 가장
밝을 때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곳을 찾았을 때다. /조선일보 DB

강연은 '기도하는 법'으로부터 시작한다. 
김 추기경은 마테오복음의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는 구절을 소개하며 
"기도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일어서지 말고 하느님이 이야기하실 
시간을 드리자"고 권한다. '경청(傾聽)'이다. 
강연은 하느님의 사랑,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신앙 고백처럼 이어진다. 
신구약은 물론 소화 데레사 같은 천주교 성인, 틸리히와 본회퍼 등 개신교 
신학자의 연구 그리고 자신의 경험까지 넘나든다. 
결론적 고백이자 권고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바오로 사도가 보낸 편지 중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6일째 오전 강연에서 김 추기경이 인용한 다음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어떤 이가 하느님과 함께 백사장을 거니는 꿈을 꿨다. 모래 위에는 지나온 길을 따라 두 개의 발자국이 쭉 찍혀 있었다. 그런데 가끔씩 발자국이 한 개밖에 없는 
것이 보였다. 그때는 그가 생애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들이었다. 
주님께 여쭸다. '주님, 제가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웠을 때는 왜 저와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너를 결코 
떠난 적이 없다. 네가 고통 중에 있었을 때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는 것은 
내가 너를 업고 있었기 때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