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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

바람아님 2015. 2. 10. 12:08

[중앙일보] 입력 2015.02.10

 

고정애/런던특파원

 

영국 런던으로부터 100㎞ 서남쪽에 윈체스터 성당이 있습니다. 일부 건물은 7세기에 세워졌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곳입니다.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 바티칸 장면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유럽 대개의 성당이 그러하듯, 성당 바닥엔 이런저런 이들이 묻혀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제인 오스틴입니다. 박석(바닥돌)엔 그러나 그가 작가였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저 ‘놀라운 자질’을 가졌다고만 돼 있지요. 1817년 매장 당시 익명으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전후 사정이 짐작이 되지요.

 정작 상념에 빠지게 한 박석은 따로 있었습니다. ‘1677년 5월 6일 조앤 리플리가 매장돼 여기에 있다’란 문구의 박석입니다. 여성일 텐데 자세한 이력을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340년 가까이 무수한 발길이 그녀 위를 스쳤겠지요. 대개들 저처럼 한번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서양식 사생관(死生觀)은 죽으면 끝이란 게 통념이지요. 전생도 내세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오히려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여 사는 곳이란 느낌을 받는 건 이곳입니다. 흔하디 흔한 동상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느 마을이든 중심부에 참전 기념비가 있습니다. 마을 전사자들의 이름이 가득합니다. 교회 주변엔 일종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영생의 지혜를 구하러 가기 위해선 사자(死者)들 사이를 걸어야 하는 겁니다. 동네 벤치에도 ‘○○○를 기리며’란 문구가 새겨져 있곤 합니다. 앞선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끊임없이 과거를 방문하게 합니다.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인 올리버 크롬웰도 그런 경우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크롬웰이 여기에 묻혔었다’는 명판이 있습니다. 궁금증을 키우는 내용이지요. 2년여 매장되긴 했습니다. 청교도 혁명으로 ‘영국 공화국’을 세운 절대통치자인 그로선 사원이 ‘제자리’라고 여겼을 겁니다. 왕만은 절대 동의할 수 없었을 테고요. 영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왕의 목을 친 게 크롬웰이었으니까요. 그의 사후 곧 왕정이 복고됐고 그는 부관참시 당했습니다. 사체는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압도적 인물이었습니다. 200년 후 명판이 설치된 이유입니다. 길 건너 의사당엔 크롬웰 동상이 세워집니다. 평민 대표기관인 의회의 대표적 인물이어섭니다. 굳이 역사책을 펼치지 않아도 선악의 잣대로, 또 당대의 평가로 재단할 수 없는 인물의 크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경험을 하긴 어렵습니다. 산 자와 사자는 엄연히 구분돼 있습니다. 한 철학자가 말했듯 “축적은 없다. 죽으면 끝. 그러니 여기서 ‘빨리빨리’”(『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현세주의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명절입니다. 조상들과도 만나는 시간입니다. 올해는 시야를 직계 조상에서 좀 더 넓혀보면 어떨까요?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