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詩와 文學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49>시간이 사각사각

바람아님 2014. 8. 19. 11:06
시간이 사각사각
―최승자(1952∼)

한 아름다운 결정체로서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사각사각 아름다운 설탕의 시간들
사각사각 아름다운 눈(雪)의 시간들
한 불안한 결정체로서의
시간들도 있습니다
사각사각 바스러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무너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시간이 지나갑니다
시간의 마술사는 깃발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아하 사실은
(통시성의 하늘 아래서
공시성인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시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입니다)
시간이 사각사각
시간이 아삭아삭
시간이 바삭바삭
아하 기실은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시간이라는 무거운 주제의 음악을 동화처럼 동시처럼, 마치 실로폰으로 연주하듯 들려주는 시다. 사각사각, 아삭아삭, 바삭바삭. 시간이 삶을 먹어치우는 이 가볍고 경쾌한 소리, 앙증맞아서 더 잔혹한 소리!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는 건 시간의 무거움을 느낀다는 거다. 그 거대한 무거움에 압도당한 채 화자는 사회니 역사니 문명이니, 인류의 시간이란 하늘 아래 휙 지나가는 참으로 허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 시간 앞에서 한 사람은 인류보다 크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