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詩와 文學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50)사람이 사는 길 밑에

바람아님 2014. 8. 20. 10:39

 

 

사람이 사는 길 밑에
―박재삼(1933∼1997)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 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다 그런 일이라!


바닷물은 끊임없이 출렁출렁 움직인다. 삶을 바다라 치면, 거대한 선박에 오른 이들은 이 바다를 유유히 지나가고, 조각배에 오른 이들은 가까스로 헤쳐 나간다. 폭풍우가 몰아치면 조각배는 위태롭게 흔들린다. 배가 심하게 흔들리면 멀미에 시달리게 된다.

난파당한 소년과 벵골 호랑이가 한 구명보트에서 보낸 조난기를 감동적으로 펼친 영화 ‘파이 이야기(Life of Pi)’에 이런 말이 나온다. ‘멀미가 나면 삶에 의욕을 잃어버린다.’ 소년이 구명보트 밑창에서 발견한 서바이벌 가이드북에 의하면, 멀미를 줄이려면 뱃머리에 있지 말고 후미에 있으란다. 시인이 제시하는 서바이벌 가이드는 출렁이는 물결, 배의 흔들림에만 정신을 다 쏟지 말라는 것이다.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그것을 받쳐주는/슬프고도 아름다운/노래가 마땅히 있다’고! 그 노래에 귀 기울이자고, 그 노래를 불러보자고, 그리 해서 삶의 의욕을 놓지 말자고! 시인은 수평선을 가리키지 않고, 우리가 몸 얹고 있는 출렁출렁 바다, 켜켜 삶의 저 밑을 가리킨다. 풍랑 아득할수록 노래는 깊어라.’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