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사진칼럼 1317

[사진의 기억] 한여름의 시린 풍경

중앙SUNDAY 2023. 7. 29. 00:24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후미진 다리 아래서 멱감는 여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과감하게 러닝셔츠를 벗어버린 여인, 차마 다 벗진 못하고 위로 치켜올린 여인, 입긴 입었는데 구멍이 숭숭 뚫린 낡은 러닝셔츠를 입은 여인, 이렇게 각기 다른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여인의 떨어진 러닝셔츠가 아프게 눈에 파고들었다. 낡을 대로 낡아서 눈만 흘겨도 구멍이 나게 생긴 저 속옷은 그 시절 시골 어머니들의 가난과 헌신을 상징한다. 항상 남편과 자녀가 먼저인 어머니가 자기의 입성까지 챙길 여유가 있었을 리 만무했다. 언제부터인가 집안에서 반짇고리가 사라졌다. 요즘엔 바늘귀를 꿰어본 적도 바느질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당연하다. 옷이 닳아 떨어질 때..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폭우 속 희망 건넨 ‘불타는 노을’

한국일보 2023. 7. 25. 04:30 지난주부터 쏟아진 집중호우 탓에 전국적으로 커다란 인명피해가 났다. 경북지역은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했고, 예천군을 비롯해 인근 지역인 봉화군과 영주시는 토사와 바위들이 밀려들어 집과 농장이 부서지며 많은 실종자가 발생했다. 빗물이 부딪치는 차창 너머로 어둠이 내리는 고속도로를 바라보던 중 저 멀리서 엷은 빛을 발견했다. 차가 점점 그 빛으로 가까이 가는 순간 갑자기 산불이 난 듯 타올랐다. 난생처음 노을이 산 전체를 새빨갛게 물들이는 풍경에 넋이 나가 일단 차를 세웠다. 차 밖으로 나와 보니 노을빛에 물든 구름은 폭포처럼 산과 산 사이로 흘러내렸다. 석양은 어둠이 밀려오기 전 혼신을 다해 빛을 발하며 천지를 빨갛게 삼켜버렸다. 비구름 뒤에는 언제가 맑은 하늘이 ..

[사진의 기억] 전쟁도 그들의 춤을 앗지 못했다

중앙SUNDAY 2023. 7. 22. 00:24 모자 차양의 그림자가 남자의 얼굴을 어둡게 해서, 마주 선 여인의 얼굴을 환한 쪽으로 띄워 올리고 있다. 주름진 얼굴들을 마주한 채, 투박한 손을 정중히 서로의 몸에 얹고 춤을 추는 사람들. 여인의 머리를 감싼 연분홍빛 스카프의 실루엣은, 배경으로 흐르고 있을 음악의 선율을 시각화하고 있는 듯하다. 사진의 고전적인 힘을 보여주는 이 사진은, 지극히 고요한데도 보는 이의 가슴을 방망이질해서 자기 안의 울림을 듣게 한다.....언론사 기자로 일하다 프리랜서 사진가로 분투 중인 최형락은, 어떤 사진을 찍더라도 그만의 고요하고 차분한 정서가 사진 속에 함께 담긴다는 평을 듣는다. 키이우의 한 지하철역에서 일요일이면 열리던 시민들의 ‘댄스 모임’은 전쟁으로 한동안..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화합으로 통하는 나제통문

한국일보 2023. 7. 11. 04:30 덕유산 자락인 전북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있다.....1925년 무주의 금광에서 생산된 금과 농산물들을 옮기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인공터널로 밝혀져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무주라는 지명도 동쪽인 신라의 무산현과 서쪽인 백제의 주계현의 앞 글자를 따와 탄생했다고 한다. 통문이 서 있는 곳을 경계로 동·서로 나뉘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풍속과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굴의 동쪽은 경상도 사투리를, 서쪽은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다. 나제통문 주변에서 식당을 하는 상인도 통문을 지나면 바뀌는 사투리에 신기해하면서도 “오래전부터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역감정 같은 것은 없다..

[조용철의 마음풍경] 몽골의 사막, 바람의 흔적

중앙일보 2023. 7. 9. 07:00 보이지 않아도 늘 곁에 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때론 사나운 맹수로 돌변하는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 바람. ■ 촬영정보 「 몽골의 미니 사막 엘승타사르하이, 바람이 사막 위에 다양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iso 100, f 9, 1/80초. 」 https://v.daum.net/v/20230709070046708 [조용철의 마음풍경] 몽골의 사막, 바람의 흔적 [조용철의 마음풍경] 몽골의 사막, 바람의 흔적 보이지 않아도 늘 곁에 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때론 사나운 맹수로 돌변하는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 바람. 사막에 바람이 분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거칠게 산 넘고 강 건너 초원을 지 v.daum.net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비를 머금은 ‘여름꽃’ 능소화

한국일보 2023. 7. 4. 04:32 능소화는 6월부터 시작해서 한여름 동안 피는 ‘여름꽃’이다. 조선시대에는 ‘굳은 기개를 지녔다’고 해서 어사화로 사용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비바람에 흩날려 꽃이 떨어져도 동백꽃처럼 ‘통꽃’으로 떨어져 단호한 선비의 모습으로 비유됐다. 그래서인지 사대부들은 능소화를 입신양명의 상징으로 삼았고 여염집에서는 함부로 키우지 못하게 했다. 만약 이를 어길 땐 곤장까지 쳤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능소화는 궁궐, 사찰, 양반집에서만 볼 수 있었고, ‘양반 꽃’이라 불리며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한때는 갈고리 모양의 꽃가루가 눈 안으로 들어가면 각막 손상의 위험이 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다행히 능소화 꽃가루는 실명의 위험과 독성이 없는 걸로 확인이 됐다. h..

[7월의 산악사진 설악산 토왕성폭포전망대] 비 그친 여름 설악, 카메라 셔터가 바쁘다

월간산 2023. 7. 3. 06:55(한국산악사진가협회 정현석 작가) 설악 운무雲霧는 춤추듯 넘실거리며 황홀한 비경을 만들고 보는 이들을 신선의 세계로 이끈다. 7월 초중순에 장마전선이 남부지방에 머물고, 설악산 자락은 그 영향권에만 있을 때면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며 설악산 골골이 수많은 폭포와 아름다운 소沼가 만들어져 천하제일경이 된다. 이번 사진은 7월 중순 비가 오는 도중에 설악산 토왕성 폭포전망대를 올랐을 때 찍은 것이다. 비룡폭포를 지나 토왕성폭포전망대에 도착한 후 한동안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었다. 사방이 운무에 휩싸여 먼 계곡은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촬영 당시 카메라 설정값 카메라 기종 : 니콘D810 렌즈 니콘 14-24mm ISO 100 화이트밸런스 자동 조리개값 F13 셔터스피..

[사진의 기억] 안개가 감추고 있는 것들

중앙SUNDAY 2023. 6. 24. 00:24 안개 자욱한 숲에 키 큰 나무들이 무리를 이룬 모습이 어느 먼 나라의 원시림 같기도 하고, 꿈에서 본 장면을 화가에게 그리게 했다는 몽유도원도의 풍경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곳을 직접 방문했던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가 ‘목가적 풍경 속에서 부조리극이 공연되는 극장’ 같다고 말한, 바로 한반도의 비무장지대 DMZ이다. 지난 2010년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서 국방부가 비무장지대의 현재를 기록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사진가 박종우와 그의 카메라에 DMZ를 개방했고, 60년간 민간인 출입이 불가하던 그곳에서 최초의 사진 촬영이 이루어졌다. 그 ‘DMZ’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이 사진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박쥐OP에서 늦가을 새벽에 찍은 철원군 풍천원 들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