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사진칼럼 1317

[사진의 기억] 그 걸음, 더 멀리 널리

중앙SUNDAY 2023. 9. 2. 00:04 바구니를 든 사진 속 처녀처럼, 그도 사진기를 들고 성큼성큼 걸었을 것이다. 어쩌면 처녀보다 먼저 맞춤한 지점에 도착하기 위해 달음질쳤을지도 모른다. 키 큰 미루나무 혹은 양버드나무 우듬지가 잘리지 않게, 처녀가 달려가는 방향의 끝에서 처녀를 반겨줄 수 있도록 초가집들은 화면 오른쪽에 유순하게 모아두었다. 이윽고 처녀가 논두렁길 가운데 도달함으로써 화면의 중앙에 안착했을 때, ‘철컥’ 사진기의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어느 날, 필름도 아니고 한 번에 수십 컷을 연속 촬영할 수 있는 디지털은 더더욱 아니고, 유리로 된 건판 한 장을 갈아 끼워야 한 컷을 찍을 수 있는 사진기였다. ‘논길의 처녀’로 불리는 위 사진은 무허가 직접 만든 ..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정감 어린 해 저무는 언덕배기 집

한국일보 2023. 8. 22. 04:30 부산 영도구 산동네에 서서히 해가 저물면 언덕배기의 집들도 하나둘 불이 켜진다. 과거 부산항으로 들어오던 외국인 선원들이 영도 산동네의 야경을 이탈리아 나폴리에 비유하곤 했단다. 하지만 외국인의 눈에 비친 화려한 산동네의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빈집이 늘었고, 한밤중에도 불 꺼진 집이 많아졌다. 영도구는 지난해 산업연구원이 예측한 전국의 50개 소멸우려지역 중 하나다. 생활인구가 감소하고 노인인구가 증가한 까닭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도시의 생기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달동네 이미지에서 탈피해 이름 있는 카페들이 생겨나면서 젊은 층의 ‘핫플레이스’로 점차 변모하고 있다. https://v...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삶의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낙조’

한국일보 2023. 8. 15. 04:30 전북 부안의 채석강 옆 격포해수욕장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한낮의 뜨거운 열기는 잠시 식고 제법 시원한 바닷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잠시 후 바다 위로 펼쳐질 아름다운 낙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인은 팔짱을 끼고, 할아버지는 손자의 손을 잡고 일몰을 지켜보았고,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으로 서로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기에 낙조의 풍경은 더욱 아름다웠다. 한반도를 관통한 태풍 카눈이 무사히 지나가고 또다시 불볕더위가 찾아왔다. ‘더위의 끝’인 말복과 ‘가을의 문’인 입추도 지났지만 더위는 쉽게 식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무더위라도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다. 때마침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얼..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한여름 새벽 사랑을 일깨워 준 자귀나무꽃

한국일보 2023. 8. 8. 04:32 6~8월에 피어나는 여름꽃으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볼 수 있으며, 주로 공원이나 정원수로 가꾼다고 한다.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는 나무다. 꽃이 짝을 지어 피어나고, 밤이 되면 잎이 서로를 마주 보며 닫히는 모습 때문이다. 아스팔트도 녹아내릴 것 같은 무더운 날씨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은 꽃말처럼 사랑의 힘이 아닐까. 휴가철, 가족 혹은 연인과 함께 휴양지로 향하다 자귀나무꽃을 발견하게 되면 잠시 걸음을 멈추는 것도 좋을 듯하다. 꽃말처럼 우리에게 한여름 무더위 대신 사랑을 일깨워 줄 추억을 선사할지 모를 일이다. https://v.daum.net/v/20230808043232256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한여름 새벽 사랑을 일깨워 준 자귀나무꽃 [왕태석..

[조용철의 마음풍경] 생의 고비엔 고비에 가라

중앙일보 2023. 7. 30. 07:00 고비에선 누구나 구름이고 풀꽃이다. 은하수 아래 서면 우주와 하나가 된다. 우주의 영혼이 내게로 와 속삭인다. 슬픔도 고통도 다 지나가고 만다. 두려움도 욕망도 내려놓아라. ■ 촬영정보 「 고비는 모래사막이 아니라 풀이 자라는 사막이다. 낙타를 타고 흔들리지 않게 빠른 셔터로 촬영했다. 렌즈 24~70mm, iso 100, f8, 1/1000초, -0.67ev. 」 https://v.daum.net/v/20230730070031538 [조용철의 마음풍경] 생의 고비엔 고비에 가라 [조용철의 마음풍경] 생의 고비엔 고비에 가라 생의 고비엔 고비에 가라. 지독히 슬프거나 괴로울 때 하던 일 정리하고 새길 가야 할 때 퇴직 후 인생 2막을 시작할 때 생의 고비엔 고비..

[C컷] “여행 사진은 자유롭게 찍는 것”

조선일보 2023. 7. 31. 21:52 수정 2023. 8. 5. 08:03 가볍게 한 장 2. 신석교의 여행사진 잘 찍는 비결 긴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코로나 시국 3년, 마스크 쓰고 여행도 못 가고 얼마나 긴 시간을 참아왔나. 거리 두기 해제 후 첫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누구든 여행지에서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을 것이다. 여행 사진 책만 스물 다섯 권을 낸 여행사진가 신석교를 만나 여행지에서 어떻게 하면 멋진 사진을 찍는지 물어봤다. 다음은 그가 말한 개성 있는 여행사진 찍는 법이다. 여행지를 다녀오면 잘 찍은 사진들은 흔하다. 다 비슷한 사진들만 찍어온다. 당신이 프랑스 파리에 갔다 치자. 누구든 에펠탑이나 몽마르트 언덕을 가겠지. 모두가 그렇게 비슷한 곳에 들러 비슷한 모습만 찍..

[사진의 기억] 푸른 바닷속 붉은 목록

중앙SUNDAY 2023. 8. 5. 00:24 고래상어가 나타나자 다이버들이 일제히 바다로 뛰어들었다. 곧 바다에서 가장 큰 상어이자 어류인 고래상어와 인간의 아름다운 군무가 시작됐다. 춤은 고래상어가 수면 아래로 표연히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계속되었다. 먼 곳의 ‘저기’를 지금 내 앞의 ‘여기’로 옮겨다주는 것을 사진의 순기능으로 꼽는다. 그 말은 곧 여기 일상에 발 딛고 있는 우리를 사진이 저 먼 다른 세상으로 순식간에 옮겨준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서의 한가운데서 볼 사진은 ‘800번의 귀향’이다. 사진을 찍은 장재연은 10년여 동안 전 세계 바닷속을 800번 넘게 다이빙해서 ‘800번의 귀향’이라는 전시로 바닷속 풍경과 그곳의 진귀한 생물들을 우리에게 전해준 ‘바다사진가’이다. 다..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더불어 살아가는 왕버드나무와 이끼

한국일보 2023. 8. 1. 04:31 장마가 물러나고 무더위가 찾아왔다. 이런 날씨에 생각나는 곳은 경남 창녕 우포늪에 있는 왕버드나무 숲이다. 우포늪은 다섯 개의 크고 작은 늪으로 이뤄졌는데, 중심부에 있는 목포늪에는 왕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요즘처럼 햇볕이 뜨거울 때도 아름드리 왕버드나무가 빛을 가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게다가 나무줄기와 뿌리를 덮고 있는 이끼를 볼 때면 태고의 원시림에서 숲의 정령이 나타날 것만 같은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청량감이 감도는 왕버드나무 숲에서 시간을 보내다 나무와 이끼의 공생관계가 떠올랐다. 이끼는 나무에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 주고 드러난 뿌리를 보호해 준다. 나무는 무성한 잎으로 이끼를 햇빛으로부터 보호를 해주며 광합성으로 얻은 양분을 이끼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