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이중섭미술賞 수상한 강요배]
'4·3' 다룬 민중미술 1세대
23년 전 고향 제주로 돌아와 직접 발로 뛰며 10년간 연구
'새벽빛' 色·현무암 질감으로 돌·바다·달 등 풍경 담아내
후드득. 제주 봄바람에 선홍빛 동백꽃이 수직 낙하했다. 꽃잎을 단단히 이고 통째로 떨어지는 꽃. 날 보란 듯 얼굴을 고스란히 달고 붉게 타오른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강요배(63)의 화집 '동백꽃 지다'가 아니었으면 유채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제주의 봄'이다. 봄날 떨어지는 핏빛 동백꽃을 보며 60여년 전 이 무렵 피로 물든 제주를 기억한다고, '제주 사람' 강요배는 말한다.섬의 북서쪽 귀덕리, 봄바람을 타고 강요배의 작업실 벽엔 '검은 바다'가 걸렸다. 흑판처럼 어두운 바다 아래 해초 같은 노란 생명체가 피어오른다. 작품명 '깊고 깊은 바다 밑'. "4·3 때 수장(水葬)된 영혼들을 표현해 봤어요. 때 되면 제사 지내듯 이맘때가 되면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네요. 그렇다고 매일 이것만 생각할 수는 없는 거고." 제27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강요배가 움푹 팬 볼을 움직였다.
- 새로 만든 작업실 겸 창고‘화안고’에 걸린, 제주 바다를 그린 그림 앞에 선 강요배. /김미리 기자
"서울 생활이 뭔가 나와는 안 맞았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란 사람을 형성한 과거에는 눈감고 앞만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익숙한 감성'이 그리웠습니다." '유년기 몸과 마음의 세포에 각인된 매운 바람의 맛'이 그를 제주로 이끌었다. 다시 돌아온 고향은 거대한 연구 대상이었다.
붓을 바로 잡는 대신 10여년간 작업실을 따로 안 만들고 제주의 속살을 탐험했다. 푸른빛이 도는 새벽이면 오름에 올랐다. 돌과 바람, 물과 불이 만든 땅의 질감과 내력(來歷)을 발로 연구했다. 1980년대 말 종로에서 산 2만5000분의 1 축척 제주 지도엔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까만 실선으로 가본 곳을 표시한 흔적이 실핏줄처럼 섬 전체에 퍼져 있다. 풍경을 다루는 그의 그림 아래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인 인문(人文)의 흔적이다.
"우리는 딱 보면 알아요. 아무것도 없이 그린 건지, 진짜 생각을 담고 연구해서 그린 그림인지." 화구 옆에 신문에서 스크랩한 신간 모음을 모아두고, 물감 마르는 시간이면 책을 편다는 그다.
- 강요배의 2005년작‘고원의 달밤’.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산’이라는 한라산(漢拏山)의 어원을 시각화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강요배의 그림은 제주의 '결'이다. 박수근의 질감이 강원도 화강암이라면, 강요배의 표면은 제주 현무암이다. 칼바람을 맞아 남으로 기운 팽나무의 뼈가지, 바람에 떨린 달과 별, 그리고 '뒈싸진 바당'('뒤집힌 바다'라는 뜻의 제주 사투리)이 화폭을 메운다. 붓은 휘모리장단처럼 캔버스 전체를 거칠고 빠르게 휘감는다. "마음화된 풍경"이라 작가가 말했다. 그의 색은 새벽녘 제주의 빛이다. "명암의 구분이 사라지고 어슴푸레한 새벽이 되면 정지용의 시처럼 들꽃들이 성신(星辰·별)처럼 빛납니다." 그림자 없는 그림이 탄생한 배경이다.
이중섭과 강요배는 제주를 공유한다. 강요배는 수상을 빌미로 억지로 인연을 엮어내고 싶어 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중섭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거친 필세(筆勢·획에서 느껴지는 기운)와 질감이 내가 체득한 제주의 미감과 조금 맞닿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사실적인 민중미술에서 제주의 풍경으로 넘어온 작가는 "이제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사물에 밀착해 코를 가져다 대고 그대로 그리기보다 공부한 것을 내면으로 삭혀 사상(捨象·핵심만 남기고 곁가지는 버리는 것)해서 약간의 실마리만 남기는 추상을 하고 싶습니다." 이 계획을 위해 그는 얼마 전 작업실 옆에 창고 겸 작업실을 새로 만들었다. 이곳 이름은 화안고(畵安庫), '그림이 편히 머무는 곳'. 강요배의 제주가 편히 머무는 곳간이 되겠다.
[강요배(姜堯培) 약력]
▲ 1952년 제주 출생
▲ 197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 졸업
▲ 1982년 서울대 대학원 회화과 졸업
▲ 2008년 제주 4·3 평화기념관 개관 기념 특별전, 1992년 학고재갤러리 '제주 민중항쟁사' 개인전 등.
▲ 1981~90년 '현실과 발언' 동인.
▲ 199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 예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