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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新 풍물기행'>서울 한복판의 '변방'.. 정순왕후, 단종 그리워하다 세상 떠난 곳

바람아님 2015. 4. 3. 10:38

문화일보 | 2015.03.27 

↑ 벽화마을 이곳저곳에 산재한 그림들. 계단 위에는 헤엄쳐 오르는 잉어들(왼쪽)이, 집 담벼락에는 구름 속 선녀들이 그려져 있다.


(35) 수필가 정순옥이 본 서울 낙산 & 이화 벽화마을


'낙산 허리 옛 성터에 이룩한 터전, 수도 서울 푸른 한강 한눈에 보고 별과 같이 정다웁게 속삭이면서 봉사하고 협동하는 아들딸이다.'

남편과 딸이 다닌 초등학교 교가 중 한 구절이다. 1993년, 낙산에서 살고 있던 남편과 결혼한 이후, 줄곧 이곳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서 아이들이 태어났고, 딸은 아버지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대를 이어 다녔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찬 강남의 고급 아파트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신도시도 부럽지 않다. 낙산은 공기 좋고 정이 넘치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낙산은 지리상으로 서울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아이로니컬하게도 변방이다. 그만큼 덜 알려진 곳이다. 한때 택시 운전사들조차 낙산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술에 취한 어떤 분이 시내에서 택시를 잡아 낙산을 가자고 한 적이 있었는데 기사는 "낙산? 정말 낙산인가요?"하고 되묻고는 그대로 강원도 낙산사로 향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내가 처음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낙산은 수십 동의 시민아파트가 비탈진 언덕에 위태롭게 들어차 있었다. 과거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산인 내사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던 위세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던 것이 1996년부터 시작된 성곽 복원사업으로 지금은 많은 시민들이 찾는 서울의 명소로 거듭났고, 역사적 지리적 가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성곽이 복원된 낙산공원에 올라서면 서울 시내 전경이 한 눈이 들어온다. 공원에는 수백 종의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낙산 인근의 주민들에게 산책 코스로 인기가 높다. 최근에는 영화나 드라마 촬영 장소로 널리 알려지면서 주말이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더욱 붐빈다.

낙산 정상에서 성곽을 따라 삼선교로 내려가는 산책길은 일상의 고단함과 복잡함을 잊게 한다. 아름다운 곡선의 성곽과 훤칠하고 튼실한 나무들, 그리고 발아래 걸려 있는 도시의 풍경을 보노라면 '구름 위의 산책'을 하는 듯하다.

낙산에는 조선 왕조의 6대 임금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유적지가 있다. 열다섯에 국모의 자리에 올랐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로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면서 생이별을 하게 된다. 낙산 정상에서 낙산길을 따라 창신동 방향으로 내려가면 청룡사(靑龍寺)를 만날 수 있는데 그녀는 이곳 청룡사 내 정업원에서 비구니가 되어 평생 단종을 그리워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날마다 올라 동쪽 영월을 바라봤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동망봉(東望峰)과 영조가 친필로 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석이 청룡사에 남아 있다.

낙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몇 갈래가 있다. 일단 손쉽게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5번 출구로 나오면 낙산 정상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탈 수 있다. 또한 삼선동과 동대문 성곽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도 있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찾아오는 길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뒤에서 낙산공원으로 향하는 이정표를 보고 올라오는 방법이다. 그곳으로 구불구불 가파른 언덕을 쉬엄쉬엄 올라오면 어느덧 낙산공원 입구가 보이고 우측으로 요즘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이화동 벽화마을이 나온다.

낙산 기슭에는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모여 이룬 판자촌이 곳곳에 있었다. 이화동 언덕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60∼70년대를 거치면서 판자촌들이 헐리고 벽돌집들이 하나둘 지어졌는데, 이곳에는 그때 지어진 노후한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길목엔 아직도 몇몇 봉제공장이 돌아가고 있으며, 전봇대에는 불과 몇백만 원 보증금의 월셋집 광고가 나붙어 있어 치솟는 전셋값, 집값의 서울이라고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이화 벽화마을은 낙후된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어 보자는 의미로 2006년부터 새롭게 가꾸어지기 시작했다. 화가들과 미술학과 학생들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계단에 화사한 꽃이 피고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는 벽화가 그려졌고, 입구에 멋진 조형물도 세웠다.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에서 아름답고 찾아가 보고 싶은 문화 예술마을로 새롭게 탄생 된 것이다.

요즘 이화동 벽화마을엔 내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인들까지 많이 찾는다. 허름한 집들이 언덕을 비집고 더덕더덕 붙어 있고, 좁고 정비되지 않은 골목길과 계단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마을이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이 된 것이다. 딱정벌레를 비롯해 각종 동식물 그림들이 마치 동화 속 풍경 같다. 특히 천사의 날개가 그려진 벽화 앞에선 사진을 찍기 위한 줄이 늘 길게 늘어서 있다.

언뜻 무질서해 보이는 한편 평화롭고, 또한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한 이 마을을 난 자주 탐험한다. 이곳에 서면 삶의 다양한 무늬들을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벽화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몇몇 카페나 음식점, 기념품점 등이 생겨났다. 올 5월이면 각종 전시관과 작은 공방(工房) 여럿이 동시에 문을 연다고 한다. 일부를 제외하면 저렴한 가격에 맛난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출출할 때 요기를 할 만한 곳도 두어 곳 있는데, 5000원이면 배를 채울 수 있다.

이런 변화가 벽화마을 사람들에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쓰레기 무단투기나 소음뿐 아니라 사생활마저도 침해당하는 경우가 생겼고, 주말이면 좁은 길에 자동차가 하루 종일 지나다니면서 사람과 차가 뒤엉켜 혼잡해졌다. 그러다 보니 마을 일부 주민들은 담장을 높이 쌓아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기도 했고, 급기야는 천사의 날개 벽화는 한때 주민들에 의해 지워졌다가 다시 그려지기도 했다.

앞으로도 주민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벽화마을은 끊임없는 변화를 겪을 것이다. 사람들이 몰리면 세련된 카페나 각종 음식점, 가게들이 빠르게 늘어날 것이고, 새로운 상업시설들도 분명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변화를 바라보는 나는 어떤 불안감과 아슬아슬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젠틀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란 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도시의 낡은 건물들을 재정비해 환경이 좋아지면 돈을 가진 사람들이 유입되어 주거비용을 끌어올리고, 비싼 월세나 집값 등을 감당할 수 없는 원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뜻한다. 이곳에서도 비교적 저렴한 세를 지불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소규모 사업체들이나 이곳에서 살고 싶어하는 주민들과 아슬아슬한 힘겨루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 다른 개발지역에서 수도 없이 겪었던 일들이다.

어쩌면 벽화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벽화만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주민들도 소박하고 순박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큰 장삿속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돈의 가치로 치환되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좀체 볼 수 없는 모습들이기도 하다. 그런 모습들에서 사람들은 아련했던 과거를 되새길 수도 있고, 마음의 고향을 찾아볼 수도 있다.

난 이화 벽화마을이 명품브랜드로 거듭나길 바란다. 낙후한 탓에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던 이곳이 새로운 문화마을로 인구에 회자되고 새로운 실험들과 시도를 통해 기존의 상업논리와는 다른 그들만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정체성을 유지하길 기대해 본다.

다시 낙산을 향하는 내 눈에 멀리 벽화마을 초입의 키가 크고 튼튼한 조형물이 앞으로 벽화마을이 나아가야 할 좌표처럼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