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5-04-09
당대 서명 연구의 ‘보물창고’ 평가
1456년 11월 14일 세조의 공신 단합대회에서 작성된 충성 서약문인 ‘오공신회맹축’(왼쪽). 여기에 적힌 양녕대군(오른쪽 위)과 효령대군의 친필 서명.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전주 이씨 장천군(長川君) 이보생(李普生) 후손가로부터 ‘오공신회맹축’을 최근 기탁받았다고 8일 밝혔다.
이를 보면 이 시대 서명은 이름의 한자를 파자(破字)하는 방식이 많이 쓰였다. 예컨대 양녕대군은 자신의 이름인 ‘제(제)’를 ‘의(衣)’와 ‘시(是)’로 나눠 위아래로 나란히 서명했다. 효령대군도 이름인 ‘보(補)’를 ‘의(衣)’와 ‘보(甫)’자로 나눠 서명했다. 당시 권력 실세들이 빠짐없이 모여 서명한 ‘오공신회맹축’에 세조의 최측근이던 한명회의 서명이 빠진 사실이 흥미롭다. 주군과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굳이 살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다는 방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참석자 중에는 훗날 덕종에 추존된 세자 이장(李暲)을 비롯해 공신 정인지 신숙주 권람 등이 포함돼 있었다. 세조가 200여 명의 왕족과 공신을 총동원하면서 일종의 정치 이벤트를 벌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회맹을 계획할 당시엔 조카 단종을 내쫓고 김종서 황보인 등 반대 세력을 숙청한 세조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셌다.
김학수 한중연 국학자료연구실장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위 세력을 규합해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세조의 위기의식이 오공신회맹축에 반영됐고 충성 서명까지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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