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취재일기] 미 역사학자가 박 대통령에게 주는 고언

바람아님 2015. 6. 5. 10:31

중앙일보 2015-6-5

 

1998년 7월 1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재즈 연주자 5명이 올랐다. 나이가 7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당시 미국엔 가깝고도 먼 나라 쿠바에서 온 음악가들이었다. 밴드 이름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1930~40년대 쿠바 재즈계를 주름잡았지만 사회주의 혁명 이후 재즈 인기가 시들면서 사라졌던 인물들이다. 수도 아바나 뒷골목에서 구두닦이로 생계를 잇던 콤파이 세군도(1907~2003) 등을 수소문해 찾아낸 건 미국인 음악 프로듀서 라이 쿠더였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전수진</br>정치국제부문 기자

전수진/정치국제부문 기자

 

 61년 국교 단절에 이어 이듬해 쿠바 미사일 위기까지 미국과 쿠바 간 외교는 아슬아슬 외줄 타기를 했지만 민간 문화교류는 맥을 이어갔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그 노력의 열매였다. 이들의 앨범은 전 세계에서 800만 장이 팔려 ‘대박’이 났다. 뉴욕타임스는 카네기홀 공연을 “역사에 남을 공연”이라고 극찬했다.

 

 미국인 역사학자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교수는 최근 통일부 황부기 차관에게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더든 교수는 지한파이면서 일본어로 미·일 관계를 강의하는 지일파다. 지난달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에게 일본군 위안부 과거사를 직시하라고 촉구한 세계 187명의 역사학자 공동성명을 주도했다. 그런 그가 박근혜 대통령의 14~18일 방미를 앞두고 황 차관에게 꺼낸 말이다.

 

 “일본은 생각하지 마세요. 대신 북한에 집중하면 방미의 의미가 더할 겁니다. 워싱턴도 이를 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만들어 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민간 교류를 통해 북한의 문을 조금씩 열어가라는 이야기다.

 

 더든이 “워싱턴도 이를 원하고 있다”고 한 배경은 뭘까. 그는 “지난해 쿠바와 국교 정상화 첫발을 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북한과의 데탕트(detente·긴장 완화)가 한·일 과거사 갈등보다 매력적 ”이라고 답했다. “북한과 데탕트를 이끌 주역은 한국이 적임자”란 말도 잊지 않았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겨울잠에서 깨운 라이 쿠더의 역할을 한국 정부가 하라는 당부다.

 

 더든 교수는 박 대통령의 방미가 ‘일본 프레임’에 갇히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미셸 오바마 여사의 (지난 3월) 방일을 앞두고, 일본 외무성이 미 국무부에 ‘위안부 얘기는 절대 꺼내지 말아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귀띔했다. 고민 끝에 미국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미국이 이런 결정을 한 행간을 한국 정부가 읽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더든은 “아베 총리의 방미에 가장 뜨거운 관심을 보인 건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다. 한국이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인상을 줘 일본만 득을 봤다”고 안타까워했다.

 

글=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