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2015.02.18

수도꼭지만 돌리면 24시간 물이 콸콸콸 쏟아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오늘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광복 후 30년 가까이 우리나라 서민들에게 먹는 물 확보는 고단한 일이었다. 1962년까지도 서울의 상수도 보급률이 56%에 머물렀다. 높은 지대의 수도는 툭하면 병아리 오줌처럼 찔끔찔끔 나오다가 끊겼다.
먹고살려면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이때의 필수 장비가 물지게다. 양철 물통을 막대기 좌우에 걸어 지고 다니던 이 도구는 1970년대까지도 모든 가정의 필수품이었다. '물지게 지기'란 '땔나무 해 오기'와 함께 고달팠던 삶의 대표적 풍경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 정일권 전 국회의장 등 각계 인사들의 인생 회고에도 한때 물지게를 졌던 일들이 에피소드로 들어 있다(조선일보 1998년 6월 3일자).
얼마나 고되었으면 직업적으로 물지게를 졌던 물장수들은 식사 때 밥상 위의 모든 음식을 싹쓸이했다. 남김없이 먹어 치운 밥상을 '물장수 상(床)'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물지게를 지느라 어머니 누이들의 허리는 휘었다. 1966년 봄에는 꼭두새벽에 물지게 지고 언덕을 올라가던 주부가 졸도해 사망했다(경향신문 1966년 4월 6일자). 같은 해 가을엔 9세 소녀가 물지게를 지고 가다 화물차에 치여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경찰은 물지게 진 아낙네들에 대해서는 야간 통금 위반을 눈감아 주기도 했다.
어느 모로 봐도 이 고된 노동은 남자들이 해야 제격이었다. 그런데도 "사내가 부엌일 거들다간 '고추' 떨어진다"는 말이 있던 그 시절엔 물지게 지기란 아낙네들 몫이었다. 보다 못한 조선일보는 1960년 가정란에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살림살이에 쫓기다가도 어깨가 휘어지게 물을 길어야 하니 (아내들이) 가엾지 않습니까"라며 남편들이 좀 도와주라는 기사를 썼다. 그러면서도 기사는 "사람이 많은 골목길에 (남편이) 물지게를 지고 지나다니기를 부인들은 원치 않습니다"라며 "'해 진 뒤 밤 틈을 타서' 두어 번 물을 길어 주면 어떠냐"고 했다(조선일보 1960년 7월 12일자).
여자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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