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5년, 콜럼버스가 두 번째로 아메리카에 갔을 때 그는 이스파뇰라섬의 인디언들이 고무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다. 이 고무공이 어찌나 높이 튀어 오르는지 그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 그후에도 유럽인들에게는 고무공 놀이가 아주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본국 사람들에게 인디언들의 모습을 직접 보이고
- 싶어 한 식민지 관리들은 1531년에 멕시코의 아스테카 인디언들을 스페인 궁전에 데리고 가서 고무공 놀이를 실연해
- 보였다. 역시나 처음 보는 인디언들의 모습과 하늘 높이 튀어 오르는 고무공 모두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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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론섬에서 고무 수액을 채취하는 모습.
서구 열강들은 1900년대 초 아시아로 고무나무를
이식해 안정되게 고무를 공급받았다.
2 아마존 지역에서만 자라는 고무나무인 헤베아
브라질리엔시스의 씨앗.
3 1897년 드레스를 입고 고무바퀴 자전거를 탄
여성을 묘사한 광고.
4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 국왕. 식민지 콩고에서의
고무 채취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 :: 18세기 ‘눈물 흘리는 나무’로 유럽에 소개
이 이상한 물질의 정체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관찰한 첫 유럽인은 샤를마리 드 라 콩다민이라는 천문·지리학자였다. - 1735년에 그는 남아메리카 정글을 탐험하다가 에콰도르에서 원주민들이 하얀 고무 수액을 모아 연기를 쐰 다음
- 여러 다양한 모양의 물건들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 그는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유럽에 보고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이 나무를 ‘카우축(caoutchouc)’이라고 불렀는데
- 그것은 ‘눈물 흘리는 나무’라는 뜻이었다. 이 말은 프랑스어에서 고무를 가리키는 말로 그대로 쓰이고 있다.
- 그런데 영국에서는 18세기에 고무가 연필 지우개로 쓸모가 있는 것을 알아내고는 ‘문질러 지우는 물건’이라는 의미로
- ‘러버(rubber)’라고 불렀다. 18세기만 해도 고무는 기껏해야 신기한 고무공이나 지우개 이상의 용도를 발견하지 못했던
-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무의 용도는 무한정 확대되기 시작한다.
18세기 말에 고무가 사용된 특이한 사례 중 하나로 기구(氣球)를 들 수 있다. 프랑스의 몽골피에(Montgolfier) 형제가 - 만들었다고 해서 당시에는 ‘몽골피에’라고 불린 기구는 비단에 고무를 입혀서 만들었다. 1783년 베르사유궁전에서
- 루이16세가 보는 앞에서 양, 수탉, 오리를 태운 기구가 하늘로 올라갔고, 두 달 뒤에는 용기있는 귀족 한 명이 스스로
- 기구를 타고 파리 상공 100m 위로 날아올랐다.
:: 기구·신발·레인코트 등에 응용
19세기에는 고무를 이용한 다양한 제품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고무 덧신 산업이 대표적이다. - 원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고무 수액을 발에 직접 붓는 방식으로 덧신을 만들었는데 이를 응용하여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 고무 덧신을 대량으로 만드는 산업이 발전했다. 지난 날 우리가 많이 신던 고무신의 먼 원조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 한편 스코틀랜드인인 매킨토시는 천에 고무 수액을 입힌 방수 옷감을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이런 레인코트를 매킨토시
- 혹은 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초기 제품들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천연 고무는 기온이 내려가면 딱딱하게
- 굳어서 탄성을 잃고 기온이 올라가면 끈적거리는 데다가 역한 냄새가 났다. 그러니 고무 덧신은 바깥의 추운 날씨에서는
- 딱딱하게 굳어 발이 아프게 되고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면 끈적끈적하게 녹아서 때로는 벗기 힘들 지경이었다.
- 1836~1837년에 불황이 닥치자 인기가 떨어진 뉴잉글랜드의 고무 덧신 산업이 망해서 무려 50만켤레의 덧신이 재고로
- 쌓여 있다가 대부분 증기기관차의 연료로 사용되었다.
천연고무의 이런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해결책을 찾아낸 사람은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1800~1860)라는 발명가이자 사업가였다. - 그는 높은 기온에서 고무가 풀처럼 녹아버리는 이유는 수분이 남아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수분을 없애기 위해
- 고무 수지에 여러 물질을 첨가하는 실험을 거듭했다. 수없이 많은 실패 끝에 1839년에 마침내 찾아낸 해결책은
- 황가루를 첨가하고 가열하는 소위 가황처리법(vulcanization)이었다. 이렇게 처리된 고무는 온도와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 강도와 탄성을 유지했다. 이후 고무의 사용 가능성은 거의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그렇지만 정작 굿이어 자신은 발명에만
- 성공했지 특허를 확보하는 데는 서툴러서 평생 소송에 시달렸고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이 하다가 결국 빚더미 속에서
- 죽었다. 그는 200만달러(현재 가치로는 5000만달러에 상응한다)를 벌었지만 그 돈을 모두 변호사 비용으로 탕진했던
- 것이다.
19세기 말에는 그야말로 고무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이 떠오르는 모든 산업마다 고무는 - 필수불가결했다. 아무리 훌륭한 기계가 발명되었다고 해도 고무가 없다면 만들기 힘들다. 개스킷이나 팬벨트와 같은
- 부품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고무 절연체 없는 전기 기구를 생각해 보라. 산업혁명의 시대에 고무는 가장 중요하고,
- 가장 많이 찾으며,
그래서 가장 시장 상황에 민감한 물질이 되었다.
:: 자전거 이어 자동차 시대의 공신
이 시대에 일반 대중들이 가장 많이 접한 고무 제품은 자전거 바퀴였다. 자전거의 등장은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 힘들 정도의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어디로든 쉽게 돌아다닐 수 있게 만든 자전거는 자유의 상징이
- 되었다.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먼 지역으로 떠나서 그곳에서 자전거로 여행하는 것이 유행했다. 여성들이 바지를 입은
- 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노인네들은 기절하도록 놀랐지만 그만큼 자전거는 여성 권익 향상의 중요한
- 상징이었다. 문제는 여성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자전거를 쉽게 타야 했는데, 여기에 다소간의 문제가 있었다.
- 스코틀랜드의 벨파스트에 사는 수의사인 던롭(John Boyd Dunlop)에게는 7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아이는 자전거를
- 타면 페달을 밟느라고 지치는 게 아니라 흔들림 때문에 더 지친다고 불평했다. 당시 자전거 바퀴는 통짜 고무로 된
- 것이었는데 이는 충격 완충이 안 좋고 조정이 힘들었다. 던롭은 안이 비도록 만들어서 공기를 채워 넣는 튜브형
- 타이어를 발명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자전거가 정말로 널리 보급된 것은
이 타이어가 나온 다음의 일이다.
자전거 다음에는 자동차가 뒤를 이었다. 특히 포드자동차가 대량 생산되는 미국이 자동차의 왕국이 되었다. - 1910년에는 미국에 20만대의 차가 생산되었고 1920년에는 1200만대가 등록되어 있었다. 유럽은 상대적으로 뒤처졌다.
- 1900년만 해도 런던에는 말이 끄는 택시와 버스가 수천 대씩 운행되고 있었다. 1914년이 되면서 일부 관광용 마차
- 외에는 모두 사라지고 자동차로 대체되었다. 당연히 엄청난 수의 자동차 타이어 수요가 생겨났다. 스코틀랜드의 던롭에
- 뒤이어 프랑스의 미슐랭 형제(영어식으로는 흔히 미셰린이라고 발음한다), 이탈리아의 피렐리 등이 자동차 바퀴 개선에
- 앞장섰다. 특히 미슐랭 형제는 안쪽 튜브와 바깥쪽 튜브로 이루어진 타이어를 개발했다. 그들은 직접 만든 자동차에
- 이 타이어를 장착하고 파리-보르도-파리 자동차 경주대회에 참가하여 100개 가까운 참가 팀 중 7위를 차지했다.
- 성적도 나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차에서는 엔진 소리 외에 바퀴에서 나는 소음이 없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그만큼 자동차의 승차감이 크게 향상된 것이다.
이제 고무 수요는 엄청나게 치솟았다. 고무 수액을 얻을 수 있는 나무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수액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헤베아(Hevea) 속 고무나무, 특히 아마존 지역에서만 자라는 헤베아 브라질리엔시스
- (Hevea Brasiliensis)였다. 문제는 이 나무가 헥타르당 3~4그루 정도밖에 없어서 열대우림에서 이 나무를 찾아 수액을
- 채취하는 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현지의 숙련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일해도 10㎏ 남짓 얻는 게
- 고작이었다. 이 사업을 주관하는 외지인 사업가, 일명 고무 왕들은 엄청난 돈을 벌어서 세계 최고 수준의 갑부가
- 되었지만 현지인 노동자(seringueiros)들은 식량과 채취 도구까지 포함하여 모든 물품을 구입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
- 때문에 대개 2년치 임금을 가불받은 상태였으므로 채무노예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하루에 40~50마일씩
- 열대우림을 돌아다니며 수액을 채취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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