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古文산책] 나라 잃은 선비의 비장한 선택

바람아님 2015. 7. 20. 00:07

[중앙선데이] 입력 2015.07.19

송병선과 守死善道

‘신은 죽더라도 살아있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臣死之日猶生之年也).’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송병선(宋秉璿·1836~1905·초상)이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해 12월 30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면서 남긴 유소(遺疏)의 결어다.

이 말을 송병선이 처음 쓴 것은 아니다.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후한서(後漢書)』 ‘진원열전(陳元列傳)’과 ‘채옹열전(蔡邕列傳)’에도 나온다. 적어도 2000년 전부터 글쓴이의 결연한 의지를 강조하는 ‘문학적 수사’로 굳어진 말이다.

그런데 송병선의 경우는 ‘문학적 수사’로만 그친 게 아니라 ‘실천적 행동’으로 구현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송병선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고종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벼슬에 나오지 않고 학문과 강학에만 몰두했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자 송병선은 서울로 올라와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을사오적을 처형하여 왕법(王法)을 바로잡을 것, 어질고 능력 있는 이들을 뽑아서 쓸 것, 정학(正學)을 숭상하여 어진 선비를 기를 것, 사설(邪說)을 물리쳐서 적당(賊黨)을 막을 것, 군사력을 길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할 것 등 열 가지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고종으로부터 비답을 받지 못하고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 의해 강제로 대전으로 호송 당하자, 고종에게 올리는 이 유소를 남기고 독약을 마신다.

 

 대전시립박물관

특이한 것은 그의 자결이 혼자만의 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자결하자 물 긷는 계집종 공임(恭任)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고, 그의 아우 송병순(宋秉珣)도 경술국치(庚戌國恥) 2년 뒤인 1912년 역시 대의를 지켜 순국하겠다는 뜻을 유서로 남기고 자결하였다.

중국에도 이런 사례가 많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화읍(畵邑)에 왕촉(王蠋)이란 사람이 있었다. 연(燕)나라 장군 악의(樂毅)가 제 나라를 칠 적에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초빙하면서, 만일 자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으면 화읍을 도륙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왕촉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었는데도 내가 지켜내지 못하였고 게다가 협박까지 받고 있으니, 의롭지 못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처신하는 길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으나, 송병선은 죽음을 택했다. 송병선은 유소에서 그 이유를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도맥(道脈)을 부지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또 중국의 왕촉은 ‘의롭지 못한 삶을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자의 ‘살신성인(殺身成仁)’과 맹자의 ‘사생취의(捨生取義)’는 표현은 다르지만 죽음으로써 인의(仁義)를 지킨다는 의미다. 송병선의 선택은 이런 유교적 가치를 사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 새삼 유교적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서 송병선의 자결과 왕촉의 죽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송병선이 일제의 국권 침탈에 죽음으로써 항거한 지 110년, 광복이 된 지 70년이다. 벌써 많은 세월이 흘러 을사늑약이니, 경술국치니, 일제 치하니 하는 것들이 아득한 옛날의 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와 군사대국화는 100년 전 일본으로의 회귀임이 분명해 보인다. 결코 무심히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이런 시점에 송병선의 ‘수사선도(守死善道)’를 되새겨 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 않겠나.


김낙철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