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8.02
지난달 바둑기사 최철한 9단의 인터뷰가 있었다. 조훈현·이창호·서봉수·유창혁·이세돌·서능욱 9단에 이어 국내 일곱 번째로 1000승을 달성했기에 이루어진 인터뷰였다.
하필이면 만나는 시간이 애매했다. 다음 일정 때문에 사진을 먼저 찍고 돌아와야 할 처지였다. 이런 경우 미리 가서 구상을 하고 장소 헌팅을 하는 게 상책이다.
몇 번 가본 적 있는 한국기원의 인터뷰 룸, 이른 시간이라 텅 비었다. 빈 사무실을 둘러보는데 담당직원이 찾아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최철한 9단 어떤 사람인가요?”
대뜸 한다는 말이 ‘착해요’다.
“독사라는 별명이 있던데 착하다니요?”
“그건 바둑 내용이 독하다는 이야기죠. 제가 아는 프로기사 중에 제일 착해요.”
의외였다. 그를 소개할 땐 항상 ‘독사’란 수식어가 붙는다.
지난 7월 23일자 중앙일보에 소개된 인터뷰 기사의 제목 또한 『‘독사’ 최철한 1000승 고지, 마흔 전에 1500승 이룰 것』이다.
결국 ‘독사’ 최철한이 착하다는 얘기니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바깥도 둘러볼 겸 계단을 내려갔다. 약속보다 이른 시간인데 1층 입구에서 목발을 짚고 경비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최 9단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중앙일보 권혁재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내 최 9단이 뒤돌아서서 눈이 마주쳤다. 힐끔 보고는 으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눈인사 건네듯 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좀 멋쩍은 상황이었다. 인사를 못 들었나 보다 생각하고 다시 옆으로 가서 인사를 건넸다.
“오늘 인터뷰 사진을 찍으러 온 기자입니다. 다쳤나 보네요.”
“아! 안녕하세요. 좀 다쳤어요”라며 활짝 웃는다.
참 해맑은 웃음이다. ‘착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올 법한 웃음이었다.
“좀 도와드릴까요?” 한국기원엔 엘리베이터가 없다. 목발로 3층을 오르는 게 만만치 않아 보여서 건넨 말이다.
“괜찮습니다”며 아이처럼 웃는다.
순간 저 표정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로 들어와 일단 자리에 앉으라 했다. 3층 계단을 목발로 올랐으니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다가, 어느 정도 다쳤는지 물어봤다.
축구를 하다가 미끄러져서 다쳤다 했다. 부러져서 수술까지 했다고 했다.
다친 이야기를 하면서도 웃는 모습에 더 이상 취재기자를 기다릴 수 없었다.
독사 같은 눈매 사진을 상상하다가 그 웃음에 홀려버린 게다.
카메라를 꺼내들며 사진을 먼저 찍자고 했다. 먼저 가야 할 저간의 사정도 이야기 했다.
최 9단은 그러자고 했다.
다리가 불편한 최 9단을 앉은 자리에 그냥 두고 3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앵글을 잡았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니 표정과 자세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았다. 가까이서 대화를 할 때 자연스럽던 표정과 동작이 아니었다.
대화를 시도했다. 표정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요량이었다.
“독사라는 별명과 달리 착하다고 하던데요.”
“네?” 잘 못들은 듯 묻는다. 순간적으로 귀를 쫑긋 세우는 느낌이 들었다.
“직원 분에게 들었는데 프로기사 중에 제일 착하다면서요?”
“아니에요” 라며 웃는다. 표정은 좋은데 자세가 어색했다.
“자세가 좀 굳었는데 아까처럼 편하게 자세를 취해 보세요.”
“네?” 또 되묻는다.
이상하다 싶었다. 다가가 혹시 귀에 문제가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네. 오른쪽 귀가 안 들립니다.”
“아! 그런가요? 전혀 몰랐는데……”
“바둑관계자들은 다 아는 얘긴데요. 어릴 적에 열병을 앓은 후 안 들리게 되었어요.”
“어느 정도 인가요?”
“초읽기를 못 들어서 두어 번 시간 패 한 적도 있어요. 바둑에 집중한 탓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막판엔 좀 빨리 두는 편입니다.”
이 대답에 숨이 턱 막혔다. 바둑을 좋아하기에 그 말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마지막 초읽기, 오죽하면 ‘피 말리는 초읽기“라고 한다. 피 말리는 1초와의 싸움, 그 시간의 의미가 상대방과 다른 게다.
1초로 승패가 갈리는 상황, 그렇다면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도 함께해야 한다.
그렇게 거둔 1000승이다.
최 9단을 만나기 전 미리 검색해본 사진들, 유난히 왼쪽얼굴이 많았다.
“왼쪽 얼굴 사진이 유난히 많던데, 잘 들리는 귀의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는 습관 때문인가요?”
“의식적으로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서 그럴 겁니다.”
오른쪽 얼굴 사진도 찍자고 했다. 아무래도 낯설었다. 익히 봐왔던 그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사뭇 달리 보이는 그의 오른쪽 얼굴, 그 덕에 그의 해맑은 왼쪽 얼굴이 우리에게 익숙해졌을 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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