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2015.08.08
이역만리 섬나라… 탈출할 곳 없어 위안부에겐 그대로 감옥이었다
1942년부터 日의 석유보급기지, 동남아에만 위안소 140개 이상
故이후남 할머니 끌려갔던 곳엔 '비명과 울음' 대신 商街소음만…
- 위안소 자리, 市場·빈민가로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져 어른들조차 "위안소가 뭐냐"
- 70여년前 이곳의 위안부들
연합機에 "여기 폭격해달라"며 야밤에 나와 흰 수건 흔들어
- 江에 우뚝 선 日의 흔적
팔렘방 명물이라는 암페라橋, 日의 전쟁 배상금으로 지어져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군도(群島) 곳곳에 위안부를 실어 날랐다. 우리 농가에서 밭 매던 10대 소녀들이 배편으로 팔라우제도, 파푸아뉴기니 같은 오지(奧地)에 뿌려졌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펴낸 증언록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들'에서 경남 하동 출신 고(故) 손판임 할머니는 "거리엔 탱크가 지나가고 시커먼 토인들이 아랫도리만 두르고 왔다 갔다 했다"고 기억했다. 동남아 서쪽 끝자락 수마트라섬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3년 부산 대신동에 살던 고(故) 이후남(가명) 할머니는 한 달 뱃길을 넘어 인도양에 면한 이 섬까지 끌려왔다. 뭍에 발 디딜 때까지 공장에 취직할 거라 믿었다고 한다. 이튿날부터 그는 수마트라섬 팔렘방 위안소에서 밤낮없이 일본군을 받아야 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이 할머니 눈두덩에는 일본군 군홧발에 찍힌 흉터가 남았다.
지난 6월 4일 팔렘방에 도착했다. 무더위에 턱턱 숨이 막혔다. 공항 짐꾼이 "한국 사람이 여길 다 왔느냐"고 말했다. 차를 한 대 빌려서 돌아다니기로 했다. 팔렘방은 유전(油田)이 개발되면서 인도네시아에서 일곱째로 큰 산업도시로 변모했다. 일본군은 1942년부터 패전할 때까지 이곳을 석유 보급 기지로 활용했다.
오후 1시쯤 열대성 호우가 쏟아졌다. 사방이 물안개로 막혀 잠시 멈췄다.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덥다가도 돌연 큰비가 쏟아지는 기후 속에서 풍토병은 소리 없이 돌았다. 70년 전 숱한 위안부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습한 땅 위로 쓰러졌다. 말라리아는 지금도 백신이 없어 해마다 65만명 이상이 사망하는 병이다. 이런 지독한 병에 걸린 위안부 앞에서 그래도 일본군은 줄을 섰다. "(군인들) 받아야 되죠. 말라리아 그거 갖고는 들은 척도 안 한다. 안 받는 것은 아랫병(성병)이나 나야지." 정부 조사 당시 고(故) 강도아 할머니 진술이다.
황토빛 무시강(江)이 도시를 남북으로 갈랐다. 자잘한 목선(木船)들은 바람 따라 쓸렸다. 당시 일본군 통신대 소속 성태섭씨는 우리 정부 조사에서 "강을 중심으로 팔렘방에는 다섯 군데에 위안소가 있었다"고 말했다. 증언록으로 드러난 위안소 참상은 '무참히 짓밟혔다'거나 '고초를 겪었다'는 말로도 다할 수가 없다.
"군인들은 내가 죽거나 말거나 올라왔다. 나도 인간이라고 소리질렀다. 다섯 명 이상 달려들어 코에서 피가 나고, 입에서도 피가 나고 전신이 마비가 될 정도였다. 말로 못할 행위도 요구했다. 내가 악바리같이 달려들고 욕을 하면서 '너희 엄마한테나 가서 그러라'고 하자, 군인이 때려서 이가 부러졌다. 귀국할 때는 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고(故) 강무자(가명) 할머니의 진술이다. 김복동(89) 할머니는 "우리는 아예 다리를 개구리 모양으로 오그리고 양옆으로 벌려 비스듬한 자세로 하루 종일 군인들을 받았다. 저녁이 되면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고 증언했다. 그때 김 할머니는 일본군의 승전(勝戰)을 빌었다. 일본이 이겨야 경남 양산 고향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팔렘방 시내로 접어들자 불쑥 솟은 정유탑이 눈에 들어왔다. 인도네시아 군인 출신의 바하르씨는 우리 정부 조사에서 "'16일리르' 지역에서 조선인 위안부 여성을 봤다"고 진술했다. 찾아가보니, 16일리르는 무시강 주변에 자리한 재래시장이었다. 빠사르(Pasar·시장)라고 적힌 상가 건물을 중심으로 노점상들이 채소나 과일 따위를 팔았다. 시장에서 기자는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관광지인) 발리 가는 비행기 잘못 탄 거 아니냐"면서 자기네끼리 웃었다. 70년 동안 증식을 거듭하며 복잡하게 뒤얽힌 시장통에서 위안소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탈출할 수도 없었다. 이역만리 섬나라는 그 자체로 감옥이었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감금됐던 고 정서운 할머니는 우리 정부 조사에서 "지리를 알아야 도망을 가지, 해방이 안 되었으면 우리는 지금까지 거기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전(終戰) 이후 동남아 위안부들은 싱가포르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갔다. 귀환하지 못한 일부는 원주민 사회에 섞인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으로 차를 몰아 20분쯤 달리니 꾸본두꾸 지역이 나왔다. 조선인 위안소가 있었다는 증언이 중첩되는 장소다. 한때 일본 군부대가 주둔했던 꾸본두꾸는 소매치기가 빈번한 빈민가였다. "꾸본두꾸에서는 카메라 줄을 목에 걸지 마라. 소매치기가 칼로 끊어갈 수도 있다"는 충고가 불쑥 떠올랐다. 위안소 잔해마저 사라져 버린 땅 위에서, 말레이족 아이들이 맨발로 뛰었다. 동네 터줏대감들에게 위안소 터가 어디인지를 묻자, "그런데 '위안소(comfort station)'가 무슨 말이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팔렘방 토박이 줄까르니안 꾹띠(44)씨는 "이곳 주민들은 위안부니 성노예니 하는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를 것"이라며 "70년이나 흐르면서 위안소를 아는 극소수 사람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꾸본두꾸 주변을 서성거리자 택시 기사가 대뜸 "암페라교(橋) 보러 왔느냐"고 물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저 붉은 다리로 데려가겠다는 뜻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성냥갑 두 개를 세로로 세워놓은 형태의 도개교(跳開橋)였다. 길이 1117m 교각 위는 관광버스와 택시가 뒤엉켜 혼잡했다. 우르르 내린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빠졌다. 택시 기사는 "이 다리가 팔렘방의 자랑"이라며 가슴을 폈다. 팔렘방 명물(名物)이라는 암페라교는 일본이 내놓은 전쟁 배상금으로 1965년도에 지어졌다. 오후 내내 정체가 지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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