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5-8-15
광복 70주년과 분단 70년을 맞아 가장 신난 이들은 전국의 태극기 제작자가 아닐까. 건물마다 태극기 일색이다. 주한 외국인들은 페이스북에서 “OO기업은 대형 태극기를 부착하면서 ‘서핑 USA’를 틀던데, 왜지?” “난 OO기업 태극기는 별로야 ”며 농담 중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선 우리는 정작 얼마나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울 수 있나. ‘위안부’ 할머니들이 전장에서 청춘을 저주하게 만든 이웃 나라의 총리는 담화에 ‘사죄’라는 표현은 마지못해 넣었으나 침략과 식민지배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들 탓만 하는 건 아둔하다. 막지 못한 우리 잘못도 크기에.
겨울잠에 빠진 남북 관계에서 광복 70주년 8·15 남북 공동행사는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났다. 북은 12일 박근혜 대통령 사진으로 추정되는 과녁을 두고 사격훈련을 했으며 남측 민간단체는 14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인간 쓰레기”로 묘사하는 전단을 북으로 날려보냈다. 한반도가 갈라졌던 후삼국 시대(901~936)도 40년을 넘기지 않았건만 지금의 분단 70년의 현실은 점입가경이다.
정부 당국자에게 15일을 의미 없이 허송하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쓴웃음으로 답했다. “역사가 어찌 기억할지 두렵다. ‘시도는 열심히 했으나 이룬 건 없었다’ 정도라도 되면 좋겠다.” 그러나 역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게다.
빛을 되찾은(光復) 광복절을 앞두고 우리가 어떻게 빛을 잃었는지 반성하기 위해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 ‘망국(亡國)’ 편을 펼쳤다. “보기 드문 영걸(英傑)들이 한 시대에 나와 세상을 위해 쓰이지 않고 서로 싸우는 데 소진하고 말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명성황후와 대원군 사이를 묘사한 이 문장은 2015년 8월 15일 한반도에서도 유효하다.
메이지유신을 설계하며 일본 부흥의 서막을 연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일본을 세탁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을 허망하게 보내며 생각한다. ‘한국을 세탁하고 싶다’고. 그리고 희망한다. 광복 80주년엔, 안 되면 100주년에라도 지금과는 다른 글을 쓰고 있기를.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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