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北韓消息

[만물상] 전역(轉役)

바람아님 2015. 8. 27. 09:25

(출처-조선일보 2015.08.27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군대 시절 어느 말년 병장이 아침마다 눈뜨면 졸병에게 물어보곤 했다. 
"내 제대까지 며칠 남았지?" 졸병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일 남았습니다!" 
졸병은 이 고참 병장이 전역할 날을 기억해두고 남은 날짜를 매일 보고하듯 일깨워줘야 했다. 
고참이 제대 날 가까워 오는 기쁨은 키우고 기다리는 지루함은 덜려는 허튼수작이었다. 
첫 휴가 가는 이병 군화를 선임이 광내주는 요즘 군대에선 상상 못할 일이지만.

▶비무장지대 GP에서 복무하다 제대 말년이 되자 소대원들이 피나무를 베어 왔다. 
몇 달씩 말리고 다듬고 사포질해 바둑판을 만들었다. 정성껏 마련한 전역 선물이었다. 피나무 바둑판은 두드리듯 돌을 
놓으면 스펀지처럼 들어갔다 나온다는 명품이다. 전역 날이 오자 바둑판도 사양하고 떠났다. 
그렇게 고대하던 날, 몸 하나 빠져나오는 것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전역을 기다리는 간절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리 없다. [만물상] 전역(轉役)
▶요즘 군대 유머에 '계급별로 가장 기쁠 때'라는 게 있다. 
"이병은 교회에서 초코파이 줄 때. 일병은 신병이 들어와 경례할 때. 
병장은 행보관이 '말년'이라고 불러줄 때." 
'건강하게 전역하기 위한 수칙'도 있다.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가라, 뇌진탕 걸릴라. 돌부리 차지 마라, 다리 부러질라….' 
전역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복무 기간이 늘어난다면 마른하늘 날벼락일 것이다.

▶1968년 북한 특수부대원이 습격해 온 1·21사태가 터지자 전역이 늦춰졌다. 
전역 특명지 받아놓은 병사는 그나마 열흘쯤 넘겨 제대했지만 차츰 늘어나 길게는 여섯 달 뒤 전역했다. 
느닷없이 하사 계급장을 달았던 병장들은 일흔 살 되도록 심란했던 그때를 잊지 못한다. 
그러니 군대 갔다 온 이들은 절실히 안다. 북한이 지뢰와 포격으로 도발해 오자 전역 연기를 자청한 병사·부사관들이 
얼마나 용기 있는지를. 이 여든일곱 명 중에 적과 맞선 전방 근무자가 여든셋이다. 
"전우들을 두고 어떻게 나만 가겠느냐"고들 했다.

▶평균 나이는 21.7세, 중·고등학생 때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목격했다. 
그러면서 "입대해 저런 일이 일어나면 앞장서 전투에 나가겠다고 다짐했다"는 병사가 많다. 
SK그룹과 동성그룹이 이 장병들을 채용하겠다고 나섰다. 
중견기업연합회는 좋은 회사 취업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기업으로선 이보다 듬직한 사원감이 어디 있을까. 
우리 사회엔 신세대의 국방 의지를 미더워하지 않는 시선이 없지 않았다. 
여든일곱 장병이 생각을 바꿔놓았다. 
'영웅'이라는 호칭과 그에 걸맞은 대접이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