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설왕설래] 황학정

바람아님 2015. 9. 17. 10:24
세계일보 2015-9-16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알려졌다. 중국 사서 ‘삼국지’에는 고구려의 활 맥궁(貊弓)을 높이 평가한 기록이 있다. 맥궁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각궁(角弓)을 말한다. 훗날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활과 화살의 날카로움이 동방의 최고”라고 자부했다. 명궁도 속출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는데, 고구려를 창업한 동명성왕의 이름이 주몽이다. 7살 때부터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하니 이 이름을 얻게 됐다고 한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도 홍건적이나 왜구와의 전투에서 신묘한 활쏘기 실력으로 숱한 일화를 남겼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활쏘기는 심신수양의 방편이 된다. 선비가 익혀야 하는 육예(六藝), 즉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예법·음악·활쏘기·말타기·글읽기·셈하기)의 하나였다. “자기 마음과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한 뒤에 화살을 내보내는데, 맞지 않더라도 나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며 화살을 맞히지 못한 원인을 반성해 스스로에게 구할 뿐이다.” ‘맹자’의 한 구절이다. 인(仁)을 행함이 활쏘기와 같다는 것이다. ‘예기’에는 “활쏘기로 큰 덕을 살핀다”는 말이 있다. 활터 이름에 ‘관덕정(觀德亭)’이 많은 이유다.


임금이 활쏘기에 앞장섰다. 성균관 문묘에 가서 제향한 뒤 종친과 3품 이상 문무관원이 참가하는 대사례(大射禮)를 열기도 했다. 활쏘기가 입신의 경지였던 정조는 “태조 이래 활쏘기가 가법(家法)”이라고 했다. 문무 고관이나 지방관이 주관하는 소사례도 자주 열렸다.


선조는 임진왜란 후 경복궁 안에 활터 오운정을 세우고 민간에 개방했다. 상무(尙武) 정신을 길러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고종황제는 1899년 활쏘기 전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경희궁 안에 활터 황학정을 세웠다. 고종은 “활이 비록 근대 무기에서 해제됐지만, 우리 민족의 혼과 호국정신이 담긴 활은 국민의 심신단련을 위해서라도 권장돼야 한다”고 했다.


19일부터 이틀간 황학정에서 ‘종로 전국 활쏘기대회’가 열린다. 서울 종로구가 전국의 국궁인들이 모이는 활 문화 축제를 여는 것을 보면 오늘날 국궁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활쏘기 인구가 1만여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앞으로 전통 활쏘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민족 기상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박완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