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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 뒤흔든 스캔들..통념에 맞선 여성 이야기

바람아님 2015. 9. 14. 09:49
한겨레 2015-9-12
김선영의 드담드담


영국 드라마 <더 스캔들러스 레이디 더블유(W)>

1781년, 상류층의 불륜스캔들 하나가 영국 사회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토리당의 하원의원 리처드 워슬리가 아내의 외도 상대인 젊은 장교를 고발한 사건이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조지 비셋 대위는 시모어 워슬리 부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났고 이들을 추적한 리처드 워슬리는 외도의 증거를 확보해 비셋에게 2만파운드의 보상금을 청구하는 대대적 소송을 벌였다. 그보다 큰 추문은 그 뒤에 발생했다. 시모어 워슬리의 애인은 한명이 아니었다. 비셋 대위를 포함해 스물일곱명의 남자가 더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주홍글씨가 박혀 있던 시모어 워슬리에게는 "창녀"라는 낙인이 덧붙여진다.

지난 8월 <비비시>(BBC)에서 방영된 <더 스캔들러스 레이디 더블유(W)>는 시모어 워슬리를 중심으로 한 세기의 불륜스캔들을 다룬 실화 드라마다. 사건의 외양만 보면 낯 뜨거운 치정극이 따로 없다. 하지만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18세기 영국판 <사랑과 전쟁>도 아니고, 시대를 앞서간 여성 섹스 혁명가의 흥미로운 모험담과도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것이 드러난다.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남자의 아내는 그의 집, 토지, 가축과 같이 사적 자산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어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본래의 자신을 찾고자 했던 여성의 이야기다.

당시 리처드 워슬리가 조지 비셋을 상대로 보상금 청구 소송을 벌인 배경에는 '자신의 재산에 흠집을 냈기 때문'이라는 명분이 깔려 있었다. 이는 실제로 그 시대에 통용되던 여성에 대한 인식이다. 드라마 안에서 리처드의 변호사가 "이런 경우에는 보통 5천파운드를 청구한다"고 충고하는 장면은 이미 처벌에 대한 법적 기준까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시모어 워슬리의 대단한 점은 바로 이러한 성차별적 기준을 역으로 이용하여 재판을 실질적인 승리로 이끌었다는 데 있다.

드라마는 워슬리 부부의 파국을 묘사한 전반부를 지난 중반부 이후부터는 법정극의 틀 안에서 시모어 워슬리(내털리 도머)의 통쾌한 반전극을 그려낸다. 시모어는 자신이 '2만파운드의 가치가 없는 아내'라 주장하고 그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외도의 상대였던 남자들을 차례로 증인석에 불러 세운다. 그 과정에서 리처드 워슬리(숀 에번스)가 감추고자 했던 추악한 비밀이 낱낱이 밝혀지고 뜻밖의 반전에 재판정은 충격에 휩싸인다. 2만파운드의 보상금은 가치가 하염없이 폭락하고, 시모어는 아이러니하게도 '1실링짜리 아내'로서 원하던 승리와 자유를 얻는다.

이 사건은 당시의 화제에 비해 그동안 크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요크셔 헤어우드 하우스에 걸린 시모어의 초상화를 본 역사가가 당시의 관습과 다르게 너무도 당당한 모습에 흥미를 느끼고 그녀의 이야기를 추적한 책 <레이디 워슬리의 채찍>에 의해 본격적으로 공개됐다. 드라마도 이 책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억압에 저항하는 이야기를 넘어서 흔치 않은 여성 승리의 서사라는 점에서 지금 봐도 여전히 놀라운 이야기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