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살며 생각하며>구름하고 너나들이하고 산다

바람아님 2015. 9. 12. 08:25
문화일보 2015-9-11
한승원 / 소설가

얼마 전부터 떠도는 구름장들하고 너나들이하며 속을 트고 사는데, 중천에 머문 하얀 구름장 하나가 나에게 요즘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서 내가 말했다.

"득량만의 여닫이 연안 바닷가에서 미역 냄새 나는 바람 맞으며, 모래알하고 짐짓 그의 시간에 대하여 논의하고, 갈매기하고 도요새하고 물떼새하고 해오라기하고 검은댕기두루미하고, 갯방풍하고 갯잔디하고 통보리사초하고 나문재하고 더불어 짭짤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하며, 바닷가 식당에서 전어회에다가 소주 몇 잔에 거나하게 취한 채 먼바다에서 객기 부리며 달려오는 파도하고 함께 재주를 넘고 또 술 한 잔 얼근하게 하면서 나 그냥 그렇게 산다."

"그러고 보니, 자네 식물성 아나키스트이구나" 하고 구름이 말했고, "그래, 식물성 무정부주의자란 말, 좋다" 하고 내가 대꾸했다. 식물성 무정부주의자는 이태백 같은 사람일 터이다. 이태백은 달 밝은 밤이면 뱃놀이를 하며 시와 술과 달을 탐하곤 했는데, 어느 날 밤 호수 속에 빠진 달을 건지려다 익사했다는 설이 있다.

석가모니가 그랬듯, 나는 내 하늘 위와 그 하늘 아래에 오직 내가 혼자 서 있을 뿐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말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우뚝한 존재라는 오만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절대고독의 존재임을 말한 것이다. 나는 내 운명의 버거운 짐을 누가 대신 짊어져 주랴 하고 출렁거리는 파도를 향해 소리쳐 노래하며 바닷가 모래밭에 열어놓은 나의 길 따라 비틀거리며 어깨춤 추며, 나 그냥 구름하고 너나들이하며 그렇게 산다.

석가모니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 제자들은 "스승님이 없으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하고 슬퍼하면서 물었다. 석가모니는 "우리들은 하나하나의 섬이다. 스스로 등불 하나씩을 밝히어 자기의 섬을 밝히며 나아가야 한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우리 도는 진리 아닌 것을 파괴하는 법(壞法·괴법)이다. 신에게도 악마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 하였다. 나는 그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하고, 나의 절대고독을 늘 느끼며 살아가게 되었다.

서울 우이동에서 살 때인데, 한밤중에 배가 심하게 아팠다. 찢고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견딜 수 없었다. 아는 의사에게 전화로 말하니 빨리 자기가 근무하는 대학병원의 응급실로 가 있으라고 했다. 응급실 침대에 누운 채 나는 아이고 으응 하고 앓았다. 옆에 선 아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고만 있었다. 흰 가운 입은 새파란 인턴들이 내 배를 만져보고, 청진기를 대보고, 초음파를 찍어보고, 이렇게 묻고 저렇게 묻고…, 그들은 자기 공부를 위해 내 아픔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나의 아픔을 냉철하게 응시했다. 내가 아무리 큰소리로 신음해 봐야, 나를 대신해서 아파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입을 다물고 신음을 내지 않고 아픔을 참았다. 눈을 감은 채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달콤했던 순간의 기억들을 되살리고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 잠을 자 보려고 애썼다. 나 스스로 나의 아픔의 시간을 먹어치우는 싸움을 했다. 이튿날 아침 출근한 의사가 급성맹장염 진단을 내리고 난 다음 수술은 곧바로 이뤄졌다. 마취에서 깨어난 다음 수술 부위의 아픔을 무릅쓰고 복도를 걸어 다님으로써 창자들이 제자리를 잡게 하고 가스가 나오도록 했다.

언제인가 닥쳐올 나의 죽음도 그와 같이 나 스스로 참아가면서 감당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 터이다.

토굴에는 여름철 밤에 가끔 지네가 출몰하여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무는 수가 있다. 물린 부위는 바늘로 쑤시는 듯 아프다. 나는 그 아픔을 잊기 위하여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쓰는 글에 깊이 심취해 버리면 아픔을 잊게 되고 얼마쯤 지나면 아픔이 가셔 있곤 한다. 지네에게 물려 아픈 것은 신경통에 특효약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네에게 다리를 물리고 나면 신통하게도 허리 아픔이 좋아진다.

적당한 병이 있어 몸이 허약해지곤 하는 것은 오만을 치유해주고 탐욕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나에게는 부정맥이 있는데, 그것이 일어나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세상과의 깨끗한 이별을 생각하며 마음을 비운다.

시름시름 앓을 무렵에는, 한밤에 자다가 일어나 오줌을 누고 나오면서 거울 속에 비친 나의 퀭한 눈 속에서 저승의 빛을 보고, 아침에 밥을 먹다가 김치 줄거리에 상한 이빨에서 주검 냄새를 맡으면 세상이 별것 아님을 안다. 그렇지만, 한낮에 뜰에 나가 찬란한 태양 빛 속에 날아다니는 나비와 꿀벌의 날갯짓과 윤기 나는 감나무 잎사귀와 향나무 잎사귀를 흔들고 내 머리카락으로 달려온 바람을 보면서 세상은 그러나 제법 별것임을 안다.

칠십 고개를 넘어서면서부터 나는 소가지가 없어졌다. '소가지 없어졌다'는 말은 세속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살지만,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는 나이가 칠십(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이라고 한 공자의 말에 동의한다.

초가을의 찬란한 햇발 쏟아지는 토굴 앞마당에 사랑초의 꽃송이들이 지천으로 벌어졌는데 꿀벌 한 마리가 앙증스러운 붉은 꽃의 자궁 속으로 머리를 처넣고 꿀을 빤다. 꽃은 진저리치며 몸을 외틀고 가느다란 꽃대는 꿀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휘어지고 있는데 나는 꿀벌을 질투하다가 문득 열없어 얼굴을 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