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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할머니의 노을

바람아님 2015. 9. 19. 10:18

조선일보 : 2015.09.16 

老부모 모시고 제주 관광 온 가족들 情景이 부럽긴 해도
몸 불편해 홀로 민박에 남아 주변을 맴도는 그 어르신은
幸福을 주고 떠날 채비하는 夕陽을 닮아 가슴이 저민다

김백윤 수필가 사진
김백윤 수필가

할머니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호수가 비단을 깔아놓은 듯 매끈하고 고요하다. 철새들도 발걸음을 멈춘 호수는 더욱 잠잠하다. 메르스의 여파로 한동안 침체됐던 제주 관광이 다시 활기를 찾으면서 민박 손님도 예전처럼 많아졌다.

오늘 초가집에는 2박 3일 여정으로 제주를 찾은 가족이 들어왔다. 중년 부부와 중학생쯤 된 아들, 그리고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함께 왔다. 어머님 때문에 초가집을 선택했다는 며느리의 손을 꼭 잡으시며 웃음으로 화답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맑고 순수했다. 가족은 부러울 정도로 다정하고 화목해 보인다.

중년 부부가 마당에서 고기 구울 준비를 하는 동안 할머니는 초가집을 구석구석 둘러보신다. 초가집 어딘가에서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하고, 한참 동안 한곳에 서 있기도 하신다. 내게 초가집 관리는 어떻게 하느냐, 관리하기에 힘들지는 않으냐 등을 찬찬히 물어보다가 담장 돌벽을 쓰다듬기까지 하신다.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을 보는 듯했고, 어느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저 아래에서 울컥 솟구쳐 온다.

민박업을 하다 보면 남녀가 짝을 이루거나 친구끼리 오는 손님도 있지만 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자녀만 데리고 오는 부부나 한쪽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부부도 있지만 양가 부모님을 함께 모시고 오는 부부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모습이 부럽기 짝이 없다. 부모님 손을 잡고 가까운 곳에 구경 한번 제대로 간 적이 없음을 생각하면 늘 아쉽고 죄송스럽기 한량없다. 하기야 나 자신도 관광을 하거나 여행을 떠나 본 기억이 별로 없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우리 집을 찾는 손님을 바라보면 다시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요즘엔 관광객도 많아지고 여행이나 관광에 대한 의식도 달라졌다. 구경하고 놀던 관광에서 쉬거나 체험하러 오는 관광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관광이란 말보다 여행이란 표현이 더 적절한지 모른다. 하루 이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체험하며 생각하는 여행객이 많아졌으니 관광 문화도 큰 발전을 이룬 듯하다.

고기 굽는 냄새가 주변을 메우더니 중년 부부가 할머니를 부른다. 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가 내 손을 살며시 잡으며 같이 가자고 한다. 정중하게 사양했지만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탁자에 빙 둘러앉은 가족들 사이에 나도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와 내가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고 있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그리 진지하게 하셨느냐고 묻는다. 눈웃음을 지으면서 주인장과 옛날이야기를 나눴다고 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이 곱고 편안해 보인다. 거동이 불편하신 나이 드신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할머니 모습 위로 며칠 전 다녀간 노부부의 모습이 떠오른다.

중년 부부와 아들 둘, 그리고 노부부 등 여섯 사람이 숙박했다. 이른 아침에 노부부는 마을 안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모습이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다가가 인사를 건네며 어디를 다녀오시느냐고 물으니 한숨부터 먼저 쉰다. 중년 부부와 아들 둘은 새벽에 한라산에 등산하러 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해 한라산 입구도 오를 수 없는 처지라 심심해서 마을을 돌아다니다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애써 눈길을 피하는 할머니 입가에는 왠지 씁쓸한 외로움이 묻어난다. 나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 온 것은 본받을 만한 일이지만 두 분을 민박집에 남겨두고 굳이 한라산을 올라야 하는 것일까. 자식들에 대한 아쉬움과 노부부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날은 온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생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아왔지만 나이 들어 경제력을 상실하다 보니 자식들로부터 홀대받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자식들과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도 이런 모습이니 일상에서는 오죽할 것인가. 노인 평균수명이 늘고 건강 상태가 좋아지면서 은퇴 후에도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들이 많다. 노인들도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늘려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또 핵가족화와 급격한 사회 변화 등으로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소외받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이런 현실 속에서 노인들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역할이 없어지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성산 일출봉에서 새벽을 알리며 나타난 태양이 하루 내내 숨 가쁘게 달려와 서쪽 하늘 끝에 걸려 있다. 온종일 이 세상과 사람들을 비추면서 행복을 안겨주었던 태양이 이제 노을이 돼 아름답게 우리 민박집을 내려다보고 있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며 깻잎에 싼 고기를 내미는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어느새 초가지붕 위로 한가득 걸린 노을이 할머니 얼굴을 곱게 물들이고 있었다. 노을의 아름다운 빛깔은 세상 저 멀리로 자꾸자꾸 퍼져가고 있었다.

김백윤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