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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북스토리] 프로코피우스의 '비밀역사'

바람아님 2015. 11. 20. 09:43

(출처-조선일보 2015.08.08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1789년 7월 14일,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던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다. 
800년 12월 25일,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는 교황 레오3세로부터 로마 황제 직을 수여받아 
신성로마제국의 첫 황제가 된다.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근교 밀비우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와 로마 황제 자리를 놓고 
대전을 벌인다. 콘스탄티누스는 승리하고, 그가 지지하던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모두 역사의 거대한 변곡점들이었다. 그런데 잠깐! 
이 모두 천 년, 천오백 년 전에 일어난 일들이지 않나. 당시 살았던 목격자도, 동영상도, 녹음 테이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과거 역사가 진실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고고학, 역사학, 언어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현재에 남아있는 과거의 기록을 분석하고 해석한다. 
과거는 언제나 현재에 남아 있는 과거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그림자와 과거 그 자체는 일치할까. 물론 아니다. 미래에 새로운 기록이 발견된다면, 
과거는 재해석 될 수 있다. 과거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만약 과거에 대한 기록이 단 하나만 존재한다면? 
단 한 명의 기록만이 남아있다면? 이것이 바로 프로코피우스의 '비밀역사'가 남긴 문제의 핵심이다. 
프로코피우스는 누구였던가. 기원 후 6세기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는 대로마제국 재건을 시도한다. 
4세기, 5세기 게르만 민족들에게 점령당한 서로마 영토들을 다시 정복하겠다는 야심적인 계획이었다. 
누가 그런 거대한 계획을 실천할 수 있을까. 바로 동로마의 영웅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장군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반달족을 멸망시키고, 
20년 가까운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와 로마를 고트족으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해방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고트왕족 지배 아래 여전히 번창하던 이탈리아는 황폐지로 변하고, 고대 로마는 마침내 멸망한다.

벨리사리우스의 비서였던 프로코피우스는 이 모든 사실들을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들'(1, 2권 페르시아전쟁; 
3, 4권 반달전쟁; 5, 6, 7권 고트전쟁)이라는 책을 통해 기록한다. 
책에 만족한 황제는 프로코피우스에게 '유스티니아누스의 건축물'이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홍보하게까지 한다. 
하지만 '건축물'과 '전쟁들' 사이에 프로코피우스는 그 아무도 모르게 또 한 권의 책을 작성하고 있었다. 
바로 그의 '비밀역사'(Historia Arcana)였다.

Procopius
 Procopius "The Secret History", Penguin Classic

1623년에야 출간된 책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였고, 
황비 테오도라는 집단 섹스와 동물과의 성행위를 즐기던 창녀 출신이었으며, 
테오도라와 유스티니아누스는 끝없는 탐욕과 거짓말로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장본인들이라는 내용이다. 
로마제국을 재건하고 소피아 성당을 설립한 '전쟁들'의 유스티니아누스와, 
황비의 외도와 잔인함을 언제나 눈감아주던 '비밀역사'의 유스티니아누스. 
누가 팩트고 누가 픽션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믿을만한 6세기 동로마제국 기록은 드물고, 
황제와 황비에 대한 기록은 오로지 프로코피우스의 '비밀역사'뿐이니 말이다.

천오백 년 전 목숨을 걸고 비밀리 쓰여진 '비밀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역사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 
승자와 패자. 황제와 비서. 선진국과 후진국. 제국과 식민지. 누구의 역사가 과연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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