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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경의 잊혀진 유라시아 이야기(10)-② 티무르의 부인 비비한음이 건축가와 키스한 이유

바람아님 2015. 12. 17. 10:44

(출처-조선일보 2015.07.17 오은경)


<①편에서 계속>
잔인하고 끔찍하지 않으면 정복자가 될 수 없을까. 
바그다드에서 티무르는 9만 명의 주민들을 참수해 해골로 탑을 세우기도 하고, 시바와 터키에서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해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나서 투항한 3천명의 포로들을 산 채로 매장시키기도 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바자제트를 포로로 잡아 동물 우리에 가두기도 하고 그의 아내들은 발가벗겨서 모든 이들에게 
음식과 술시중을 들게 하는 등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모욕을 주기도 했다.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티무르는 자비심이 없었다. 단지 말을 타고 전투를 하는 데에만 몰입했다. 
미국 역사학자 저스틴 모로치(Justin Morozzi)의 저서 《테머레인: 이슬람의 칼, 세계의 정복자》 (2004)에 따르면 
티무르는 수백만 명을 살육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만 집행했다. 그는 이슬람교도였다.

기독교도들과 힌두교도들을 정벌할 때는 올바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라고 합리화했으며, 
같은 이슬람교도교도를 공격하고 학살할 때는 그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중앙아시아 전체와 터키, 인도까지 점령을 마친 그는 중국의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 지금의 카자흐스탄 땅에서 
심한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회군을 하게 되는데 69세의 나이에 사망하기에 이른다.

잔인하고 포악한 정복자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티무르는 예술과 학문을 사랑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실크로드의 중심지이며 세계적 관광 명소로 자리 잡은 도시 사마르칸트이다. 
사마르칸트는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문화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티무르의 작품이다. 
사마르칸트는 티무르가 얼마나 세계화의 달인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국제화된 도시였다. 
사마르칸트 도시에 스페인에나 있는 도시 ‘마드리드’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였다.

정복자와 세계화의 달인이었던 그는 원정 지역마다 아내를 두었다. 아내만 총 18명이었다. 
그중 수도인 사마르칸트에 거주하는 본부인 비비한음은 남편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고 있었다.
티무르와 부안 비비한음의 사랑이야기는 아름다운 비비한음 모스크와 얽혀 한층 안타까움을 더한다.

현명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비비한음은 남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남편이 인도 정벌을 마치고 오기 전까지 사마르칸트에 
대리석과 푸른 옥으로 가장 아름다운 사원을 짓기로 결심하고 당시 최고의 건축가를 초청한다. 
하지만 젊은 건축가는 60세가 넘은 비비한음에 반해서 티무르가 인도 원정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마무리하려면 
자신에게 키스를 허용해주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현명한 비비한음은 하렘에 있는 다른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도록 해주겠다고 역제안하며 회유한다. 
여성들은 계란에 색칠을 입힌 것처럼 색을 벗겨 내면 모두 똑같은 존재라고 달랜다. 
그러나 건축가는 무색무취의 술이 들어간 잔과 물이 들어 있는 잔을 비유하며 겉으론 똑같지만 자기는 술이 들어 있는 
잔처럼 사랑이 끓어오르고 있다며 막무가내로 버틴다. 남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에서
비비한음은 그녀의 뺨에 키스를 단 한 번 허용한다.

그러자 젊은 건축가는 그녀에게 너무나 뜨겁게 키스를 한 나머지 그녀의 뺨에 붉은 반점을 남기고 말았다. 
며칠 후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비비한음의 뺨을 보고 진노를 하여 그 건축가를 붙잡으러 사람을 보냈지만 
건축가는 막다른 옥상으로 도망갔다가 거기서 날개를 달고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비비한음이 티무르에게 헌정한 건축물은 그녀만큼이나 아름다운 자태로 복원되어 지금도 사마르칸트를 장식하고 있다.
구미에미르 유적.
구미에미르 유적.
티무르가 잔혹한 정복자임에도 서방에서 그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십자군 전쟁의 참전 멤버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서쪽으로 침공해 들어올 수 있는 동력을 차단해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티무르가 사망하고 
나서야 오토만 터키는 이 지구상에서 그리스라는 나라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었다(1460-1830).

이때 티무르는 유럽의 여러 나라와 교류를 했다. 스페인은 두 명의 대사를 티무르 제국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그중 헨리 3세가 파견한 루이 곤살레스 클라비호는 1403년 티무르에게 오스만 투르크를 동쪽에서 협공해줄 것을 약속받는다.

그리고 루이 곤살레스 클라비호는 티무르에 관한 글을 일기 식으로 기술하여 서방세계에 투르크 정복자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티무르는 서방세계로서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기에 그의 잔혹함은 
위대한 정복자의 이름 뒤로 사라져 버렸다. 
역시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도 승리한 나폴레옹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1941년 구소련의 고고학자 게라시모프는 검은 옥 덮개와 육중한 철관에 눕혀져 있는 티무르의 시신을 분석했다. 
1미터 72센티의 시신에서 절름발이의 흔적을 확인했고 69세의 나이였지만 50대 초의 강골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600년 전에 그 나름대로 세계화를 달성했던 유라시아 투르크의 정복자 티무르가 보다 장수했다면 명나라의 운명과 
그리스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고, 세계사가 새로 쓰였을 것이다. 
세계화는 영토 확장과 제국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90년대 이후 세계화의 의미 또한 그 의미가 완전히 변화되었다. 
세계화의 출발과 시작은 정복자의 정복 전쟁에서 비롯되었고 피의 전쟁을 불사한 것이었다. 
오늘날 경제적 의미의 시장 확장과 문화 다양성에로의 개방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우리에게는 아직 ‘정복자‘라는 명칭도, 유라시아도 낯설게 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