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옌칭도서관의 후지쓰카 옛 소장본으로 18세기 동북아 지식 교류의 모습 복원
19세기로 이어지며 '문예공화국' 형성
정민 한양대 교수는 2012년 7월부터 1년간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로 머물렀다.
그는 동양 고서의 보고(寶庫)인 옌칭도서관에서 한 일본인 학자의 이름을 만난다. 후지쓰카 지카시(藤塚�·1879~1948).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 교수로 추사 김정희 연구자. 소장하던 추사의 '세한도'를 아무런 대가 없이 한국에 돌려준 인물이다.
1940년 경성제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일본에 돌아갈 때 그가 수집한 장서와 자료는 기차 화물칸 몇량을 가득 채울
정도로 방대했다. 후지쓰카는 한·중 지식인 교류와 관련 있는 자료는 무엇이든 긁어모았다.
정민 교수는 어느 날 옌칭도서관에서 우연히 후지쓰카가 소장했던 옛 자료를 발견했다. 책은 다시 책을 불렀다.
한·중 지식인 관련 책을 찾다 보면 여지없이 후지쓰카 소장본이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 경제적 곤란에 처한 아들이 내놓은
아버지 소장서 중 상당수가 들어온 것이었다. 후지쓰카는 책 속에 숱한 메모를 남겨놓았다.
정민은 고백한다. "이 자료들을 되풀이해 들춰보다가 내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같다는 생각을 했다.
(후지쓰카는) 구체적인 관련 정보를 더 얻으려면 다시 어느 책을 보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메모를 따라가면서 그와 나 사이에 묘한 접속이 이루어지는 듯한 비밀스러운 느낌을 종종 갖곤 했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정민 지음|문학동네| 720쪽|3만8000원 | 청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박제가는 뛰어난 학문과 글씨 솜씨로 중국 지식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다. /문학동네 제공 |
정민은 후지쓰카 소장본과 관련 자료를 통해 18세기 한·중 지식인 교류의 모습을 꼼꼼히 복원한다.
홍대용(1731~1783)은 한·중 지식인 교류의 첫 장을 연 조선 지식인이었다.
그는 북경에서 한족 지식인 엄성·육비·반정균 등과 만나 사귀며 관련 기록을 남겼다.
이어 유금·이덕무·박제가·유득공·박지원 등이 사행길에 나서면서 활발한 지식인 교류가 일어났다.
박제가는 뛰어난 시와 글씨로 북경 문인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북경 서점가인 유리창 거리에는 박제가의 가짜 글씨가 돌아다닐 정도였다.
박제가의 아들이 편찬한 후지쓰카 소장본 '호저집'에 따르면 박제가는 기윤·옹방강·완원·나빙 등 당대 중국 최고 지식인
110명과 교유했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교류는 19세기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며 당당한 '문예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을 형성한다.
'문예공화국'은 18세기 유럽에서 쓰던 말이다. 공통 문어인 라틴어를 통해 유럽 인문학자들이 소통하던 지식 커뮤니티를
말한다. 이 상상의 공화국은 같은 시기 동양에서도 공통 문어인 한문을 통해 이뤄졌다. 청을 무찔러야 할 오랑캐로 여기던
조선의 '북벌(北伐)'이란 국시(國是)는 지식인 교류를 통해 '북학(北學)'으로 바뀌게 된다. 총과 칼이 아니라 말과 글로
소통하는 세계는 동시대인의 지적인 교류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18세기 한·중 지식인 교류의 모습이 20세기 초 일본 학자의 자료 수집으로 한데 모이고,
21세기 한국 학자가 미국 도서관에서 이를 발견해 복원에 이르는 한·중·미·일의 인연은 한편의 대하드라마 같다.
정민 교수가 옌칭도서관에서 찾아낸 '후지쓰카 컬렉션'에 대해 하버드대에서 발표한 후,
중국인 담당 사서는 "다쉐저라이러(大學者來了·대학자가 왔다)"라고 했다 한다.
관련 자료의 표절 및 진위까지 섬세하게 고증하는 대목에 이르면 저자의 학문이 어느 경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