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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경의 잊혀진 유라시아 이야기(11) 고구려의 진정한 후손 지금도 있을까?

바람아님 2015. 12. 18. 11:35

(출처-조선일보 2015.07.24 )


한민족이 지난 1.5세기 동안 지독한 성장통을 앓아왔던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선조가 먼 옛날 한반도에 정착한 이래 
거칠게 변화하는 외부세계에 등을 돌린 채 이 땅에서만 조용히 살기만을 고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겨운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를 박차고 나갔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고려인들”이다. 
그들은 한때 50만 명에 육박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에 대략 20만명, 카자흐스탄에 10만명, 
러시아에 10만명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고려인이 겪었던 강제이주야말로 한민족의 시련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가늠케 해준다.

1937년 9월 초 소련의 극동 연해주에 살던 17만여 명의 고려인들은 수천 킬로 떨어진 중앙아시아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한다. 
강제이주의 명분은 고려인들이 1937년 중국을 침공했던 일본의 잠재적 첩자이자 공모자라는 판단에서였다. 
그 당시 한국은 지도 상 일본 땅이었으니 스탈린의 소비에트 정권은 한국인과 일본인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 땅에서 이주해온 고려인들은 공식적으로 ‘인민의 적’이란 누명을 써야 했다. 
소련 당국은 아무런 준비도 안 된 고려인들을 집합시켜 강제로 화물열차에 태웠다. 
이들은 짧게는 35일, 길게는 3개월 동안 화물칸에 실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초원과 황무지로 버려졌다.

불결한 화물칸에서 질병과 기아로 죽은 사람도 부지기 수였다.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 작가 알렉산드르 강은 자신의 작품에서 매우 사실적으로 그때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한밤중에 열차에서 내린 고려인들은 화물트럭으로 옮겨 타 집도 없고 인적도 없는 초원 한가운데로 버려졌다. 
현지인 화물트럭운전사들은 보드카에 취한 상태에서 운전했다고 한다.

보드카에 취하지 않고서는 차마 고려인들을 초원 한가운데 떨어뜨려 놓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이들은 밤이면 영하의 추위에서 떨다가 땅속에 구덩이를 파거나 움막집, 또는 갈대로 엮은 집에서 살아야 했다.
고려인 모국방문단과 함께 한국을 찾은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김알라(75)씨. /조선일보 DB
고려인 모국방문단과 함께 한국을 찾은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김알라(75)씨. /조선일보 DB
다행히 현지 중앙아시아사람들은 타지 사람이라고 고려인들에게 텃세를 부리거나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들 역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소비에트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구소련 시대에는 민족적 갈등이란 이론상 있을 수 없었다. 
고려인들은 극단적으로 열악한 여건에서도 인민의 적이란 오명에서 명예를 회복하려고 소련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인들에게는 소련군입대가 허용되지 않았다.

고려인들은 무기 대신 삽이나 농기구를 사용하는 노동군대에서만 근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고려인들에게 가장 큰 서러움은 ‘많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나라 잃은 서러움이 아니라’ 
소련시민임에도 소련군에 입대할 수 없다는 서러움이었다. 
거기다가 고려인들은 예외 없이 거주지에서 30킬로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이동의 제약을 받았다. 
하지만 암울한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고려인들은 알몸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것에 대한 공식적 보상을 받았다. 
이주 후 3~4년 후쯤 건축비와 토지를 배당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2년 동안 집단농장에서 수확한 농산물에 대해 국가징수분을 면제받았다. 
또한 소련 당국은 이들에게 극동에 있던 한국어학교를 중앙아시아에 그대로 설립하게 허락해주었다.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 활동도 허락해주었다. 
예를 들어 카자흐스탄에 있는 ‘조선극장’은 한국을 포함하여 한국어로 연기하는 전 세계 극장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손꼽히고 있을 정도이다.

타민족과 비교해 고려인에게 군 입대를 제외한 나머지 차별은 없었다. 
오히려 고려인들은 유난히 학구열과 노동생산성이 높았기 때문에 현지 민족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았다. 
구소련 시대에 대학교육을 이수한 고려인의 민족 비율이 유대인에 이어 2위를 차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어 학교 중 일부는 1960년 초까지 운영되다가 고려인들의 요청으로 1947년부터 러시아 학교로 편입되기도 했다. 
학부모 된 입장에서 자식들이 현지 아이들처럼 한국어가 아닌 러시아어를 배워 빨리 주류사회로 편입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려인들 스스로 결정한 결과였다.
강제이주 된 고려인들의 재정착 촌 전경. /조선일보 DB
강제이주 된 고려인들의 재정착 촌 전경. /조선일보 DB
스탈린의 강제이주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1세대 당사자들은 엄청난 고통을 감수했지만 
2세대와 3세대로 오면서 그 고통은 잊혀 졌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감상에 젖은 한국인들이 현지 고려인에게 그때의 고통을 회상해보라고 재촉하지만 현재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돌아가신 어른들의 회고를 통해 기억한다 해도 그 고통을 실감하지 못한다. 물론 어떤 고려인 화가는 한국인들의 
연민을 사기 위해 강제이주를 테마로 한 작품을 그려내서 남한 사회에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고려인들은 실질적으로 명예회복을 했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중앙아시아 정부에 고려인 2세, 3세 장관들이 자주 이름을 올리고, 사회 각계에서 고려인들이 
영웅칭호를 받을 정도로 공식적 활동이 두드러졌다. 소련해체 후 1991년에는 법적으로 모든 고려인이 복권 되었다.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러시아로 귀화하는 경우에는 가산점 혜택까지 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수령 동지”란 말까지 그대로 모방해서 쓸 정도로 김일성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스탈린이 고려인들만 
유난히 미워했던 것은 아니다. 
스탈린은 같은 무렵에 민족 고유의 자치주에 살고 있던 90만 명의 독일계 소련시민을 고려인보다 훨씬 무자비한 방법으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크림반도에 둥지를 틀고 살아왔던 22만 명의 타타르인들을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강제로 분산시켰고, 
서부에 사는 유대인들을 동부 시베리아로 대거 이주시켰다. 
이어서 러시아인을 포함해 쿠르드족, 터키족, 칼미크, 발트 연안 민족 등 다수의 민족을 소비에트 전역으로 분산시켰다.

이처럼 한민족의 후예인 고려인들에게 강제이주와 같은 혹독한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이들은 그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현지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한결 강하게 성장했다. 고려인은 말 그대로 19세기 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빈손으로 조선국경을 넘어 
온갖 역경을 이기고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린 늠름한 고구려의 후손이다. 
이제 피해의식에 입각한 역사의식에서 벗어나 고려인의 긍정적 측면을 재조명할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고려인들이 당당한 유라시아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