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 2015.12.29
표암 강세황은 자화상에 ‘그 초상화는 내가 그리고 그 찬문도 내가 썼다(其眞自寫 其贊自作)’는 글을 남겼다. 강세황이 초상(肖像), 즉 ‘닮을 초, 본뜰 상’자를 쓰지 않고 사진(寫眞)이라 한 게 이채롭다. 참됨(眞)을 그려낸(寫) 것이 초상화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1713년(숙종 39년) 이이명은 “어떤 대상의 정신이나 태도를 사실대로 표현해내는 것을 사진이라 하니 임금의 초상화는 어진(御眞)이라 해야 한다”고 했다. 1472년(성종 3년) 정수라는 일본인이 승하한 세조의 어진을 그려 바치자 온 조정이 “받으면 안된다”고 아우성쳤다. “북송의 유학자 정이(1033~1107)가 ‘부모의 초상화를 그릴 때 터럭 하나, 털끝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다(人寫父母之眞 一毫一髮不似 則非父母矣)’라 했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후 고려 임금의 어진을 색출하는 족족 묻어버리거나 불에 태운 이가 뜻밖에도 세종이었다. 세종이 ‘분진갱영(焚眞坑影)’의 만행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고려 임금들의 어진 속에 그려진 생생한 ‘일호일발(一毫一髮)’에서 고려의 정신을 목도하고는 섬뜩했을 것이다. 그랬던 세종이 도화서에 명을 내려 상왕(태종)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퇴짜를 놓았다. 태종이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으니 이 초상화는 불태우는 게 낫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말은 그랬어도 명색이 상왕의 초상화를 약간의 ‘뽀샵 처리’도 없이 생생하게 그린 것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다.
1744년(영조 20년) 영조가 40살과 51살에 제작된 초상화 두 점을 놓고 신하들과 품평회를 열었다. 영조가 눈 나쁜 신하에게까지 “안경 쓰고 자세히 보라”고 권했다. 아마 ‘전혀 늙지 않으셨다’는 꿀 발린 소리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은 한결같이 “머리, 안색이 예전과 다르다. 왜 이렇게 늙으셨냐”고 돌직구를 날렸다. 그리는 것은 물론 품평까지도 거짓이나 과장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명맥을 잇던 조선의 어진 48점은 한국전쟁 직후에 거의 대부분 불탔다. 부산의 동광동 창고에 보관 중이었는데 1954년 12월26일 일어난 판자촌 화재가 삽시간에 옮겨붙었다. 지금은 태조·영조·철종 등 극소수 어진만 남아있다.
내년 2월14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의 어진과 진전’ 특별전이 열린다. 못난 후손들 때문에 불에 그을린 채 간신히 남아있는 영조(연잉군·그림)와 철종의 어진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