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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시론]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바람아님 2016. 1. 1. 22:53

(출처-조선일보 2016.01.01 유종호 문학평론가·前 예술원 회장)

丙申年 붉은 원숭이해… 원숭이띠는 才士 많아
모든 정치인 재주 발휘해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를

유종호 문학평론가·前 예술원 회장 사진오늘 2016년 새해를 맞는다. 

한 해 달력을 바꾸는 시점이 되면 우리는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구상하는 유서 깊은 관행을 이행한다. 

개인 차원에서 그렇고, 공적 차원에서도 그렇다. 

돌아보는 일에 자책과 회한이 따르고 앞날에 간구와 희망을 거는 것 또한 되풀이되는 우리네 인간사다.

광복 이후 우리는 70년을 보냈다. 

분단과 전쟁, 시련과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성취의 역사이기도 하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일단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양 날개를 달고 선진 사회로 비상(飛上)하려는 꿈의 실현은 요원해 보인다.

절대 빈곤의 전근대는 몰아냈으나 우리가 마주친 것은 교육 수준과 불만 수준이 한껏 높은 '현대'라는 곤경이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미래를 도둑맞은 청년 수효가 불어나고 있다. 

19세기 러시아 소설에서 보았던 '잉여인간'이 21세기에 우글거린다. 

반(反)인간적이고 기상천외한 신종 범죄가 속출해 불안 심리를 조장한다. 

전문가의 분석과 각종 경제적 지표는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한다. 

위기의 경보음이 다가오는 북소리처럼 점점 크게 들려온다.

눈을 돌리면 우리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엄혹하기 짝이 없다. 

세계 열강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던 구한말과 흡사하다는 우려 섞인 지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나라의 등불이 꺼졌던 치욕적 역사 경험에도 우리의 대응 태세는 심란하기만 하다. 

마땅히 있어야 할 초당적 공동 노력은 보이지 않고 언어폭력의 난타전이 있을 뿐이다. 

서로 옛 상처를 들쑤셔 새 피를 흘리게 한다. 

임진란 직전의 조정이나 풍전등화의 구한말에도 기승을 부렸던 고색창연한 망국적 진영 싸움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나치게 비관적인 전망이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관론에는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는 역설적 순기능이 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기 신세를 비관하지 않는다. 

우리의 오늘을 직시하고 장기적 안목으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국민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철학자 러셀은 역사적으로 보아 자유주의 정치 이론이 상업과 상업 에토스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교역은 전혀 다른 종족 관습과 접촉하게 함으로써 자기 중심적 독단론을 폐기한다. 

구매자와 판매자의 관계는 자유로운 두 당사자 사이의 흥정과 타협 관계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공적 질서가 허용하는 한 공생과 관용을 실천한다. 

조선조는 성리학을 원리주의적으로 채택해 원산지보다도 더 경직된 제도로 구조화하고 자폐적 쇄국을 실천했다. 

이런 유산 탓인지 우리에게는 공생과 타협 정신이 결여돼 있다.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시행하고 있는 열린 사회에서 정치권이 보여주는 행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국정 운영 경력이 있는 정치 집단이 각종 현안에 일단의 책임 의식도 보여주지 못하고 정치적 공격 수단으로 삼기만 하는 

것도 해괴하다. 

프랑스 철학자 레몽 아롱은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즘에 대응하는 프랑스 정부의 당시 외교 정책을 비판했다. 

그의 말을 듣던 장관이 국책회의 의장에게 전하겠다면서 물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소?" 

대안을 제시해달라는 장관의 요구에 말문이 막힌 아롱은 그 후 정치적 발언을 삼갔다고 회고록에 고백했다.

구체적이고 적정한 대안 제시 없이 성토만 일삼는 것은 사람만 바꾸면 된다는 투의 전형적 데마고그(선동가) 행태다. 

선동에 치중하는 정치 집단일수록 경험에 따라 계몽된 적 없는 젊은이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로마제국 황제 네로는 30에, 프랑스대혁명 당시 공포정치가 생쥐스트는 26세에 죽었다. 

순수한 젊음이 가공할 반인간적 정치 운동에 동원된 역사적 사례는 허다하다. 

기억에도 생생한 20세기 전체주의 체제, 문화대혁명 시대의 홍위병, 나치 독일의 유겐트 등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난국의 궁극적 책임은 집권당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적 자원이 풍부하다. 

그것은 20세기 후반의 역사적 성취와 함께 낙관론의 근거가 되어준다. 

100만명을 돌파한 '통일나눔펀드' 약정의 성황이 보여주듯 통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추세도 고무적이다. 

'도둑'처럼 맞는 통일이 아니라 우리의 주체적 노력으로 결실을 보는 통일을 간구함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올 병신(丙申)년은 붉은 원숭이해다. 원숭이는 꾀와 재주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숭이띠에는 재사(才士)가 많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은 대개 기운이 세고 꾀가 많은데, 대표적인 이가 오디세우스다. 

올해에는 모든 정치인이 재능과 재주를 발휘해서 정치 발전과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국민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