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12.26 송혜진 기자)
[송혜진 기자의 느낌] '부모들의 멘토'… 소아청소년정신과전문의 오은영
굶기고 때리는 것만이 학대 아니다
친부모니까 화내고 때릴수 있다? 그런 권리 가진 사람 세상에 없어
냉정 잃지 않고 '사랑의 매' 든다고? 그런 자신감 있다면 말로 가르치세요
23일 서울 삼성동에서 만난 소아청소년정신과전문의 오은영(50)은 한 아이와의 긴 상담을 마치고 땀에 젖은 얼굴로 나왔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대한민국 부모 중에서 오은영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다.
'국민 부모 멘토' '육아계의 유재석'으로도 불린다.
15년 넘게 아동학대예방센터 전문위원으로 일했고, 현재 오은영소아청소년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2003년부터 EBS TV '60분 부모'에 출연했고, SBS TV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2006년부터 올해 11월 종영까지 꼬박
만 9년을 진행했다. 오은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인터뷰를 시작하자"고 했다.
'학대'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학대의 기준, 훈육의 기준
―친부모가 아이를 때리고 굶긴 소식이 또 나왔다.
"굉장히 드물게 이상한 사람 또는 돌연변이들이 저지르는 행동이다. 인간은 부모가 되면 본능적으로 자식을 사랑한다.
그 친부는 아마도 인격 구성에 문제가 있거나 치료가 필요한 사람일 것이다.
이런 뉴스가 나올 때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계속 생기나' '사회가 더 각박해졌다는 뜻인가' 하고 묻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동은 약자 중에서도 약자다. 그래서 아동이 피해자인 사건은 대개 굉장히 늦게 알려진다.
오래 묻혔던 사건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동학대예방센터 전문위원으로 오래 일했다.
"극단적인 경우가 많았다. 오래전 친부와 계모가 아이를 땅에 묻어놓고 굶긴 사건이 있었다.
땅속에서 구조된 아이가 나오자마자 걸신 들린 듯 밥을 먹던 장면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계모가 아이를 키우다 지쳐 홧김에 휙 밀쳤는데 아이가 뇌출혈로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그 아이가 숨지기 직전에 이미 센터에서 격리 조치를 권고했고 내가 그 아이의 치료를 담당했는데,
재판부에서 '그래도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게 좋겠다'면서 아이를 계모에게 돌려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숨졌다.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한국은 유난히 '아이는 그래도 부모가 키워야 한다'고 믿는 나라다.
법 조항도 사법부 판단도 여전히 그 정서적 바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아동학대와 폭력에 있어서만큼은 그 신화가 깨질 필요가 있다."
―평범해 보이는 가정에서도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나.
"아동 학대가 꼭 이렇게 극단적인 형태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에선 아이를 키우면서 훈육을 위해 회초리를 한두 번쯤 드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회초리를 아끼면 아이를 망치게 된다'고 믿고 있다.
'냉정을 잃지 않고 사랑의 매로 다스리는 건 괜찮다'고도 생각한다.
단언컨대, 이성적인 체벌이란 없다. '사랑의 매'는 허구다.
아이를 한 대라도 때리는 순간, 아이는 무력과 폭력에 굴복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논리가 아닌 힘으로 사람이 눌릴 수 있고 혹은 누를 수 있다는 사실부터 배운다.
어떤 아빠는 '나는 그래도 침착하게 매로 아이를 가르치겠다'고 말하는데, 그럴 때마다 난 대답한다.
'그 자신감으로 그냥 말로 하라'고."
―말로도 학대를 할 수 있나.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다 화부터 내는 것, 소리를 지르는 것도 흔히들 '훈육'이라고 오해하지만 결국은 학대다.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거나 때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게 설령 친부모라고 해도."
―훈육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
"훈육(訓育)이란 부모가 꼭 해줘야 하는 가정교육을 말한다.
훈육을 통해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법을 배우고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익힌다.
문제는 아이가 부모의 말을 단 한 번 만에 재빨리 알아듣고 예쁘게 따라하는 존재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만 기억해도 평정심을 가지고 끝까지 가르쳐줄 수 있을 거다."
당신을 믿어라, 당신의 아이를 믿어라
한 TV 프로그램에서 배우 엄태웅의 딸 지온이(왼쪽 아래)에게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밥을 먹도록 가르치는 오은영. 지온이는 결국 전화기를 보지 않고 밥을 먹었다. /KBS TV 캡처 |
―숱한 부모와 아이를 만나고 상담한 끝에 얻은 '단 하나의 원칙' 같은 게 있을까.
"딱 한마디다. '믿어라.' 요즘 부모들은 자기 자신부터 너무 못 믿는다.
―아빠들도 상담을 하다 우나.
“(끄덕끄덕) 요즘 TV만 틀면 아이 잘 키우는 아빠들이 나오지 않나.
―내 아이를 믿으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건가.
“‘얘는 잘할 거야’라고 그냥 믿어보라는 거다. 편식이 걱정일까. 편식 때문에 아프거나 죽는 어른은 사실 생각보다 별로 없다. 공부가 걱정일까. 공부 말고 다른 재능이 있을 거다. 선행학습을 안 해서 걱정일까. 그 덕에 아이는 천천히 깊게 배우게 될 거다. 일단 좀 무턱대고 믿었으면 좋겠다. 난 다행히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덕분에 자존감이 꽤 높은 사람으로 성장했다.”
부모님의 그 한마디
오은영은 1965년 서울 서대문 한 산부인과에서 8개월을 가까스로 채운 이른바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출생 직후 몸무게가 2㎏이 채 되지 않았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병원엔 인큐베이터가 많지 않아 그냥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오은영의 아버지는 아이의 생존이 걱정된 나머지 외국 의학 서적을 구해 뒤져가며 집안의 온·습도를 최대한 엄마의 뱃속 환경과 비슷하게 맞춰놓고 아이를 키웠다고 한다. 오은영은 “지금 날 보면 안 믿기겠지만 자라는 내내 잔병치레가 잦았고, 몸집도 또래에 비해서 유난히 작았다”고 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큰사진 가능)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셨겠다.
“그런 티를 한 번도 안 냈다. 밥을 워낙 안 먹어서 속을 많이 썩였고 병원을 그렇게 들락거렸는데도 말이다.
한번은 의사선생님이 ‘너 안 먹어서 또 아프구나. 어떡할래’라고 했는데,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내게 핀잔을 주기는커녕
환하게 웃으면서 ‘선생님, 얘가 이렇게 병원 단골이 된 걸 보니까 아무래도 커서 의사가 되려나봐요’라고 대꾸했다.
지금도 난 그때 어머니의 표정과 목소리를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게다가 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심각한 편식쟁이였는데 어머니는 한번도 ‘너 다 안 먹으면 앞으로 국물도 없어’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뭐가 먹고 싶으면 얘기해. 언제든지 해줄게’라고 했다. 물론 어머니에게 섭섭한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어머니가 단정해 보이라고 내 머리를 싹둑 깎아 보냈는데, 학교 가보니 다른 여자 아이들은 긴 머리에
리본을 묶고 있었다. 내가 이 나이에도 긴 머리 스타일을 고집하는 건 그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웃음)”
―아버님은 어땠나.
“나와의 약속은 꼭 지키셨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효창운동장에서 30원인가 내고 스케이트를 타곤 했다.
다들 스케이트를 빌려 타던 시절인데, 나만의 스케이트가 갖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동네 체육사 창가에 걸려 있는 스케이트를 가리키며 ‘저걸 사달라’고 했다.
우리 집 가정 형편이 그렇게 넉넉하질 않아서 아버지는 내게 ‘언젠가는 꼭 사줄 테니 기다려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내게 빨간 스케이트를 사주셨다.
스케이트를 갖게 된 기쁨보다도 ‘아빠가 내 약속을 6년 동안이나 잊지 않았고 결국 지켰다’라는 놀라움에 더 흥분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오은영은 대학에 입학한 직후, 같은 의과대학 동기와 연애를 시작했다.
8년 연애한 뒤 결혼했다. 남편은 현재 피부과 의사이고 두 사람이 낳은 아들은 현재 고3이다.
―소아청소년정신과전문의라도 막상 아이를 키우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결혼하고 5년 만에 아이가 생겼는데,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를 낳고도 내가 의사 오은영으로서의 삶을 잘 유지할 수
있을까’ 걱정됐고 많이 두려웠다. 낳고 나서야 기우(杞憂)라는 걸 알았다.
아이를 낳자마자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모든 복잡한 고민은 바로 다 잊혔다.
물론 워킹맘으로 살면서 미안했던 순간도 많다. ‘녹색 어머니’ 한 번을 못 해주고 아이를 키웠다.
남편도 나도 바쁘다 보니 아이를 쫓아다니면서 공부를 챙겨주지도 못했고.
우리 아이가 아는 건 참 많은데, 선행학습을 안 해서인지 시험 성적은 잘 안 나오는 편이다.
그렇지만 요새 갈수록 집중력이 좋아지고 있고, 공부 태도도 좋아 보인다.
하나를 알아도 깊이 있게 이해하고. 2학년 기말고사 때 성취도도 아주 많이 올라갔다.
아들에게 ‘그래, 이게 제대로 된 공부야! 아주 잘하고 있어!’라고 칭찬해줬다.”
―남편도 육아에 적극적이라고 들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중요한 문제는 같이 의논한 뒤 내가 최종 결정하고, 자잘한 건 반대로 남편이 챙긴다.
아이 숙제나 준비물을 봐주고 운동화를 사러 가는 일 같은 건 남편이 하는 식이다.
사실 육아는 부와 모가 같이 해야 완성되는 거다. 요즘 육아에서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양성성(兩性性)이다.
씩씩하고 책임감 있고 강함으로 대표되는 남성성, 배려하고 조화롭고 협동할 줄 아는 여성성.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간형이 인간관계도 원만하고 진취적이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다는 게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다.
부모가 같이 아이를 키워야 이 양성성이 제대로 길러진다.
엄마 혼자 아이를 돌보고, 아빠는 나가서 돈만 벌어오는 식으로는 이제 곤란하다.”
우리에겐‘공격성’이 필요하다
오은영은 최근 한 방송에서 ‘청춘들이여, 공격성을 길러라’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오은영은 “공격성이야말로 이 시대 모든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들에게까지 필요한 힘”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
“내가 존경하는 학자 도널드 위니캇(Winnicut)이 재정립한 개념이다.
그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자기만의 생을 살아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동력이 ‘공격성(aggression)’에서 나온다고 봤다.
인간이 성장하면서 꼭 발달해야 하는 것이다.
옛것을 허물고 새롭게 뭔가를 창조하는 것.
어려움을 딛고 앞으로 나가고 생을 겪어내고 도전하고 고비를 넘는 것.
바람이 불어도 버티고 누가 어깨를 퍽 치고 지나가도 꿋꿋이 서 있는 것.
(손가락을 탁 튕기며) 좌절해도 까짓것 한 번 더 해내는 것! 공격적인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이게 참 많이 부족해 보인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시련이나 위기의 순간을 겪게 하지 않으려고
―오늘 상담했던 아이도 그런 경우였나 보다.
“아이가 이유 없이 소리 지르고 난리를 쳐도 부모는 일단 동요하지 않고 버틸 수 있어야 한다.
―사춘기 청소년과 대화할 땐 좀 다르지 않을까.
“초등학교 때까진 원칙을 가르쳐줘야 한다. 타협이나 협상도 하지 않는다.
―한국은 ‘애착 육아’에 대한 신화가 강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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