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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 향연] 응답하라 카이로스여!

바람아님 2016. 1. 11. 09:31

(출처-조선일보 2016.01.11 정미경 소설가)

새해가 밝으면 다들 품게 되는 신앙심과 학구열과 숱한 결심
일상적인 생로병사 시간 보내다 차원이 다른 섬광의 순간 꿈꿔
고지식해서 경건한 일상 있기에 강렬하고 전복적인 날도 가능해

정미경 소설가 사진뜻한 바가 있어 기상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겼다. 
새해니까. 뜻한 바를 위해 집 근처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바빠도 열람실로 가기 전, 로비에 있는 수족관을 잠시 들여다본다. 
투명한 물속 열대어들의 유영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하지만 내가 찾는 건 따로 있다. 
아주 작고 투명한 새우 한 마리. 얘를 발견한 날은 글이 잘 써진다. 
영감이 산소 방울처럼 퐁퐁 솟아난다. 
그러니까 도서관에서의 내 글쓰기는 수초 사이에 꼭꼭 숨어 있는 이 새우와 매우 연관이 깊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징크스가 그렇듯 그 까닭은 잘 모르지만. 
마침 새우도 기상 시간을 앞당겼는지, 또랑또랑한 눈을 굴리고 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발걸음도 가볍게 열람실로 갔는데 이게 어인 일인가. 평소 태평양처럼 넓어 보이던 열람실과 세미나실까지 만석이고 
전광판엔 대기자 순번이 떠 있었다. 다들 한 시간 반을 앞당겨 하루를 시작한 게야. 
터덜터덜 돌아올 수밖에. 아아, 아깝다. 새우까지 봤는데.

일요일. 
지각하지 말라는 목사님의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십분 일찍 출발했는데 주차장은 미어터지고 교회 안엔 앉을 자리가 없었다. 
다들 이십 분 일찍 출발한 게야. 하나를 보면 열을 깨우치는 머리인지라, 1월엔 동네 체육센터도 가지 않기로 작심했다. 
아마도 놀고 있는 아령 한 짝도 없을 게 분명하고 산소는 엄홍길 대장만이 버틸 수 있는 히말라야 정상처럼 희박할 것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불타는 신앙심과 학구열과 숱한 결심들을 한날한시에 품게 되는가. 
날마다 뜨는 해를 단 하루만은 먼저 보고야 말겠다고, 고속도로를 10만 피스 직소 퍼즐로 만들며 동해로 달려가는가. 
이것은 열정인가, 연약함인가, 불안인가.

2000년 전에 쓰였음에도 성경이 여전히 숱한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까닭 중 하나는 지금 읽어도 등장인물들의 
숨결이 느껴질 듯 생명력 넘치는 언어의 힘이라 할 수 있겠다. 
성경 언어인 헬라어는 유연하면서도 정교하다. 
예를 들면 시간이라는 개념은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로 뚜렷이 나뉜다. 
측정 가능하고 일상적인 시간, 생로병사의 시간은 크로노스다. 
한편 해가 뜨고 지는 것과는 상관없는 시간, 
세계와 개인을 전복시키고 전혀 새로운 차원이 펼쳐지는 섬광의 순간은 카이로스라 부른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전후한 시간 같은. 
평범한 우리는 어떨까. 그처럼 강렬하진 않아도 우리 역시 각자의 카이로스를 꿈꾼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시간의 그물망 속에서 카이로스라는 빨간 부표를 향해 항해하는 것이다. 
제각각의 갈망을 품은 채.

지난해 탁상 달력을 정리하며 보니 매달 한 줄의 문장을 위에 적어놓았다. 
첫 장엔 이런 문장.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나를 파괴한다!' 
볶은 메뚜기 한 줌을 쥐고 광야로 떠나는 선지자에게나 어울릴 법한 글귀를 왜 적었을까. 
1월이니까. 집중력을 높여보겠다고 스탠드 책상을 사놓고는 옷걸이로 쓰고 있는 사람이. 
11월에는 생계형 문장이 적혀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두 개의 문장 사이에 내 수준에 맞는 카이로스의 순간이 몇 있었을지도.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사뮈엘 베케트는 정작 '고도'가 무엇인지는 저도 모른다고, 
알았더라면 책 속에 이미 썼을 거라고 의뭉을 떨었다. 고마운 일이다. 
그게 뭔지 알았더라면 고도는 진즉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심지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기도 한다. 이렇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고도를 기다리고 있지.

참 그렇지….'

그렇다. 
크로노스가 없으면 카이로스도 없다. 
고지식해서 차라리 경건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평범함 속에서 카이로스의 순간을 맞닥뜨릴지도 모르지만, 또 아닌들 어떠리. 참, 고백하건대 수족관 안에는 새우가 너무 많아 눈을 뜨고 그걸 찾지 못하긴 참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