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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일자리 늘리기 개혁의 안 풀리는 미스터리

바람아님 2016. 2. 16. 00:27
중앙일보 2016-2-15

일은 삶의 원천이다. 종교에서도 ‘일하지 않는 자 먹지 말라’고 한다. 여기엔 자비도 없다. 그런데 분명 나와 같은 일을 하는데, 월급은 나보다 두 배 많다면. 불평등이 태동하고, 불만이 축적된다. 물론 다 같으면 오죽 좋을까. 그러긴 힘들다. 능력과 경쟁, 성과 또한 일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기회의 평등과 획일적 평등을 혼동하면 혼란만 인다.

 그런 면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꽤 괜찮은 구호다. 비정규직이라도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고 성과를 내면 같은 월급을 주자는 거다. 일본 정부는 조만간 기간제 근로자에 이어 파견직에도 이를 적용하는 법안을 만든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이 구호가 노동계를 중심으로 번졌다. 경영계도 토를 달지 않았다. 인건비를 줄이려 비정규직을 채용하는 그릇된 인력운용 관행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경영 방침엔 사람이 아닌 돈만이 유일한 기준이다.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구호가 사라졌다. 노동계도 적극적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매년 자동적으로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에선 도저히 구현하기 힘들어서다. 호봉제는 고용이 안정된 정규직을 위한 임금체계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역할이나 직무, 성과에 따라 돈이 주어져야 가능하다. 정규직의 임금체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정규직 중심의 노조로선 대략 난감한 상황인 셈이다. 주장은 했는데, 자신들의 밥그릇을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 기득권을 내려놓자니 아깝다. 이게 이 구호를 갑자기 사라지게 한 이유 아닐까.


 그나마 국회에 제출된 기간제근로자보호법 개정안은 격차 해소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비용절감형 고용 행태에 제동을 거는 데 방점을 찍고 있어서다. 3개월만 일해도 퇴직금을 주고,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이직수당을 주고, 위험한 일에 비정규직을 동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아니라도 비정규직의 설움과 불만을 달래는 측면에선 상당한 진전이다.


 이 법이 얼마 전 전격 철회됐다. 그 과정이 아리송하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조차 철회 사실을 몰랐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를 “통치행위”라고 했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조치라는 얘기다. 통치권이 국무위원도 모르게 행사되는 게 맞는지 의문이다. 시장을 통치행위로 접근하는 건 사회주의적 발상이란 지적도 나온다.


 사실 노동개혁은 처음부터 주객이 전도된 채 진행됐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이나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추진한 정부 주도의 하드개혁인지, 노사정과 여야 합의에 의한 소프트개혁인지도 정리하지 않은 채 오락가락했다. 전문부처(고용노동부)는 윗선의 기관이나 비전문부처에 휘둘리며 제 목소리를 잃어 갔다. 아마추어가 프로에게 조언한 꼴이다. 잘못 만든 규제를 풀어야 할 판이 꼬여 갔다. 일자리를 늘리면서 고용시장의 격차도 줄이자던 패키지형 노동개혁은 그렇게 어그러졌다. 고용시장 경장(更張)의 왜곡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경기대침체(Great Recession)의 원인 중 하나로 ‘불평등의 복수’를 꼽았다. 지금과 같은 노동소득 몫의 하락이나 소득격차를 방치하면 경제성장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54%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과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소비는 제대로 일 수 있을까. 일터엔 시간 때우기형 근로가 횡행하고, 씀씀이는 줄 수밖에 없다. ILO의 진단은 일한 사람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소비와 투자의 되먹임 과정(feedback loop)이 무시된다는 경고다.


 이쯤 되면 어떤 이유로 개혁작업이 방향전환을 거듭했는지 점검해야 한다. 기간제법 철회 미스터리를 비롯해 노사정 합의와 파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담은 백서가 필요한 시점이다. 난마처럼 얽힌 정책 추진 과정을 뜯어고쳐야 다음 개혁을 기대할 수 있어서다. 예측 가능한 정책을 바라는 국민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따지고 보면 백서는 정책의 원천이다. 백서 작성엔 노사정이 모두 참여해 가감 없는 의견을 담아야 한다. 물론 서로를 봐주고, 은근슬쩍 감추는 자비도 없어야 한다. 판단은 국민의 몫이다. 혼란과 혼돈은 지금까지로 족해서 하는 말이다.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