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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처·의부증은 단순한 질투 아닌 정신과 질환

바람아님 2016. 3. 18. 23:48
매일경제 2016.03.18. 15:58

미모의 여인 로라(줄리아 로버츠 분)는 돈 많고 잘생긴 데다가 자기를 공주처럼 떠받드는 마틴(패트릭 버긴 분)에게 반해 결혼을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마틴은 로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지시한다. 선반에 있는 통조림부터 욕실에 걸린 수건까지 모든 것을 항상 가지런히 정리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로라가 다른 남자의 눈에 띄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트집을 잡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폭행 후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매너 좋은 미소를 지으며 꽃이나 값비싼 옷을 선물한다.


이는 결벽증과 의처증을 가진 남편 때문에 결국 파국을 맞는 영화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1991년 상영)'에 나오는 내용이다.

의처증은 '사랑'과 '단순한 질투'로 포장되지만 폭행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우리나라도 최근 의처증이 있는 60대 남성이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되는 이웃 남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남성은 1년 전에도 아내의 불륜을 의심해 다른 남성에게 흉기를 휘둘렀고 심각한 의처증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은 남편 또는 부인이 상대방의 정조(貞操)를 의심하는 '질투형 망상장애'로 정신질환의 일종이다. 서양에서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질투의 화신' 오셀로를 원용해 '오셀로 신드롬(Othello Syndrome)'이라고 불린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은 다른 정신질환이 없지만 배우자가 성적으로 부정한 행동을 해 자신이 피해를 입고 있다고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정상적인 사람은 배우자를 의심하다가도 아니라는 증거가 확실하면 서로 믿게 되지만, 의처증이 있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고 치료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다. 심지어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조차 배우자의 불륜 상대로 망상하는 경향이 있다.


평균 발병 연령은 40세지만 18세부터 90대까지 고르게 증상이 나타난다. 보통 전체 인구의 1~4%가 의처증 또는 의부증을 가지고 있다.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원은수 교수는 "의처증과 의부증은 단순한 질투와 달리 아무런 증거가 없어도 배우자의 외도에 대해 매우 공고한 확신을 갖고 오히려 배우자가 부정하다는 증거를 찾고 싶어한다"며 "배우자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망상에 따른 행동이상을 동반한다"고 말했다.


원 교수는 이어 "보통 조현병, 우울증, 마약이나 알코올 사용 장애 등과 같은 다른 정신과 질환에서도 배우자 외도에 대한 망상이 나타날 수 있지만 의처증 및 의부증은 정신이 멀쩡해도 갑작스럽게 발병하는 경우가 많고, 배우자의 외도에 대한 망상만 존재하고 그 밖의 다른 증상은 없다는 게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질투형 망상장애는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더 많이 발생한다. 특히 배우자 외도에 대한 망상을 제외하고는 다른 증상이 없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질투형 망상장애는 일반적으로 여성은 의존성이 강해 배우자가 옆에 있어야만 안심하는 사람일 때, 질투가 많고 독점력이 강한 성격, 배우자에 대한 심리적 열등감, 동성애적 경향, 자신의 마음속에서 부정한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때 이러한 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남성은 알코올 중독이나 편집증이 있는 부모, 권위적이고 지배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원 교수는 "개인적인 특징으로는 주로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이나 낮은 성취감을 경험한 사람, 대인 관계에서 비정상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잘 생긴다"고 설명했다.

질투형 망상장애의 원인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유전적 요인, 생화학적 요인, 환경적 요인 등이 모두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정신과적 질환뿐만 아니라 뇌의 병변 또는 내과적 상태에 의해서도 발병할 수 있어 기질적 원인이 없는지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질투형 망상장애는 치료하지 않고 계속 방치할 경우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 치명적이지 않은 신체적·언어적 폭력이 지속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자살이나 타살 등 극단적인 행동으로 악화될 수 있어 입원 치료 등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재진 교수는 "의처증이나 의부증은 망상이 매우 확고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망상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면 치료로 이어지기가 더욱 어렵다"며 "오히려 환자의 심적인 고통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다가가 그 부분에 대해 치료를 받을 것을 설득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질투형 망상장애는 치료가 매우 어렵다. 배우자와 떨어지기 전까지는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배우자와 분리되더라도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많이 시행하는 치료는 정신치료이며, 치료자와 환자가 깊은 신뢰관계를 쌓으며 치료를 진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정신치료만 받기에 부족한 경우, 예를 들어 환자의 망상에 의한 폭력적인 행동이 임박한 상황에서는 입원을 하기도 하며 항정신증제, 항우울제, 기분조절제 등의 약제가 사용되기도 한다. 다만 약물 치료 효과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여서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적절한 치료를 진행해야 한다.


노인들의 망상장애는 치매의 전조증상일 가능성이 있어 주의를 요한다. 치매는 일반적으로 기억력 저하로 증상이 시작되지만 망상, 성격변화 등의 증상이 먼저 생긴다. 서울시 북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은정 과장은 "망상장애는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힘든 질환인 만큼, 평상시 노인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가족의 많은 관심이 필요하며 우울증이나 만성질환에 걸리지 않도록 정기적인 검사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병문 의료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