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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코리아] 오바마가 히로시마에 가면 안되는 이유 강인선 논설위원

바람아님 2016. 4. 15. 11:35

(출처-조선일보 2016.04.15 강인선 논설위원)


강인선 논설위원 사진존 케리 국무장관이 최근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해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했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지 71년 만에 현직 국무장관의 첫 방문이니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세계의 관심이 쏠렸다. 케리는 "이번 방문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미국 측은 '사과'가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의 비전인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한 방문이라고 설명했다.

'사과'란 단어가 나오면 미국도 예민해진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인 대다수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일본의 항복을 끌어내고 미국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면서 "미국이 사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면 
정치적으로 상당한 타격이 될 수 있다"고 썼다.

미국도 국내적으론 과거사 논쟁의 민감함을 모르지 않는다. 
1995년 워싱턴은 '스미스소니언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2차대전 종전 50년을 맞아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던 폭격기 '에놀라 게이'와 피폭 자료를 전시하기로 했다. 
참전 군인 단체들이 들고일어났다. 이 전시가 2차대전 때 수많은 미군의 희생을 무시한 채 거꾸로 침략자 일본을 피해자로 
보이게 할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갈등 끝에 박물관장이 물러나고 전투기만 전시하기로 했다.

그간 미국은 동북아 역사 문제에 무관심으로 대응해왔다. 
한·일 역사 갈등과는 관련도 없고 해결을 위해 끼어들 의지도 없다는 게 일관된 입장이었다. 
2000년대 한·일이 교과서, 독도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을 때도 '두 나라가 알아서 해결할 일'이란 식이었다.

최근엔 약간 달라졌다. 
미국은 지난해 한·일 위안부 합의 성사를 위해 공개적으로, 또 막후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 
양국에 격려도 하고 압력도 넣었다. 워싱턴에서 한·일 정상 간 교류가 끊기면 미국이 중재 역할 하느라 바빠진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미국 역할론에 의미를 둔다.

지난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동북아역사재단'과 버클리대가 공동 주최한 학술회의 '동북아의 역사와 정치'도 
바로 이 주제를 다뤘다. 열쇠는 중국과 북한이었다. 
아시아에서 중국 영향력이 급격하게 커지고 북한 핵·미사일 도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한·미·일 협력은 
미국의 핵심 안보 이익이다. 이 안보 틀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한·일 관계가 안정돼야 하는데, 역사 문제로 냉랭해지면 
미국에 부담이 된다. 미국이 동북아 역사 문제가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직결된다고 보게 된 이유다.

그럼에도 미국은 여전히 한·일 역사 문제를 비이성적인 감정싸움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회의에 모인 한·미 양국 학자들은 "동북아에서 역사란 그 자체가 국제정치학적 현실이자 국익이란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다음 달 일본서 열리는 G7 정상회담 때 히로시마 방문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히로시마는 원폭 피해를 상징하는 도시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은 일본이 피해자란 인상을 줌으로써 아직 반성과 사과가 끝나지 않은 아시아의 가해국이란 사실을 
가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동북아는 역사가 곧 국제정치 이슈가 되는 특수한 지역이다. 
그런 동북아의 역사적 감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내딛는 오바마의 한 걸음은 오히려 분란만 일으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