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他/김형경의남자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바람아님 2016. 5. 7. 23:59
[중앙일보] 입력 2016.05.07 00:13
기사 이미지

김형경/소설가


서른 살 무렵, 출판사에 근무하던 시인 친구가 느닷없이 물었다. “너는 먹고살기 위해 얼마만큼 모욕감을 참고 있니?” 질문에 놀란 이유는 그 문장이 내 마음에서 나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20대 내내 생이란 모욕감을 참는 일이구나 싶었다. 나의 미숙함과 못남을 알아차리면서 느끼는 모욕감, 타인의 부당한 요구를 대하면서 느끼는 모욕감, 정녕 이런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가 싶을 때 느끼는 모욕감이 있었다. 나는 친구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모욕감과 관련된 내면 감정이 정리조차 되지 않았다.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에는 ‘모욕감’이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 분노, 수치심, 죄의식 등 대부분의 감정에 대해 그 근원을 밝히고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한 성과가 축적돼 있다. 하지만 어떤 심리학 책이나 정신분석 용어사전에서도 ‘모욕감’을 만난 적이 없다. 물론 나의 박문함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름으로 모욕감의 실체를 더듬어 본 적이 있다. 모욕감 속에는 우선 나르시시즘과 박해감이 있는 듯했다. 자신의 우월함과 선함을 짓밟혔다고 느끼는 감정이었다. 모욕감 속에는 또한 상대에게 자신을 공격할 힘을 부여해 주는 인식의 오류도 있는 듯했다.

 
기사 이미지

개인적으로 사회에 적응해 갈수록 모욕감은 덜해졌다. 사회에 통용되는 관습과 질서, 남성 사회가 여성을 대하는 방식 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치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모욕감을 넘어선다는 의미 속에는 유아적 전능감을 포기하는 일, 박해감을 알아차리고 그 뒷면에 억압된 분노를 다스리는 일, 현실 검증력을 갖추고 타인과의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는 일 등이 포함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다시 의문이 일었다. 세상에는 감수해야 하는 모욕감과 결코 참아서는 안 되는 모욕감이 있는 게 아닐까. 그것까지 감내한다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결과가 되는 게 아닐까.

농담처럼, 관용어처럼 남자들 사이에서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문장이 사용되는 것을 자주 듣는다. 남자들의 사회생활에 모욕감의 요소가 훨씬 많이 존재할 거라 짐작할 수 있다. 경쟁심이 일상적 감정이기에 모욕감이 더 깊고, 책임감이 숙명이기에 참아야 할 모욕감이 더 많을 것이다. 내가 찾아낸 모욕감에 대한 의문의 최종 답안은 이것이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란 없다는 것, 아니 모욕감 자체가 없다는 것. 인간의 존엄성은 타인에 의해 모욕당하거나 훼손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