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운데 하나가 평생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있어야 했고, 책도 끊임없이 읽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늘 시력이 좋았다. 몇 년 전부터 노안이 시작되어 책을 읽을 때 돋보기가 필요하게 되자 비로소 안경이라는 도구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 모두들 왜 그렇게 가벼운 안경을 찾는지 이해가 되었고.
주로 잠들기 직전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책을 읽는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다보면 설핏 잠이 드는데, 얼굴에 여전히 안경의 무게가 느껴져서 곧 다시 깬다. 깨어나 보면 언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미 안경을 벗은 상태이다. 분명 나는 변했고, 상황도 변했는데, 몸에 남은 기억이나 관성 때문에 의식이 속는 경우다. 학도병으로 6·25를 겪은 어떤 분은 빗소리만 들으면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울적해지고 몸이 괴로워진다고 했다. 우비만 입은 채 비를 맞으며 질척한 참호 속에서 웅크리고 자야 했던 소년의 경험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끝났고, 빗물 고인 웅덩이 속에서 자야 하는 일은 이제 없음에도 빗소리는 여전히 아름답지도 정답지도 않다.
의식을 속이며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나인가 내가 아닌가. 어차피 자아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며,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것도 아니다. 확고하게 나라고 믿고 있는 이 존재는 사실은 무엇으로 계속 변하면서 어디를 향해 계속 가고 있는 지향성이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의 삶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서도 벗어났고, 운이 나쁘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났으며, 남은 삶의 잠깐 동안만 안경 신세를 지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는 중이다.
부희령(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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